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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Jan 15. 2019

멋진 할머니 되기 프로젝트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또 당했다. 프레드릭 배크만한테.

오베라는 남자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책을 읽었다가 큰 코 다쳤다. (지금 코피 나는 중)

이건 스릴러 같기도, 미스터리물 같기도 하면서 되게 드라마적이고 따뜻하고 한 편으로는 판타지적이기도 하다. 작가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일곱 살 엘사가 사는 멘션은 온통 이상한 사람들뿐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괴물부터 수상하고 커다란 개, 잔소리 쟁이 브릿 마리 아줌마 잠시라도 투덜대기를 멈추지 않는 택시기사 알프,  아빠와 이혼하고 조깅용 레깅스에 반바지를 덧입는 예오리와 함께 살고 있는 엘사의 엄마 울리카까지. 그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은 당연 엘사의 할머니. 할머니는 정말.... 못 말린다. 할머니는 동물원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경찰에게 똥을 던지거나 막무가내로 병원을 탈출하거나... 어른이라면 하지 않은 일들을 종종 벌린다. 그리고 늘 그 옆에는 틀린 맞춤법을 교정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애늙은이 엘사가 있었다. 


그 둘은 정말 단짝이었다. 할머니는 엘사가 잠들기 전에 늘 미야마스를 포함한 환상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엘사의 커지는 키에 맞춰 장롱 안을 넓히며 영원히 작아지지 않는 장롱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는 죽기 전 편지로 멘션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미션을 엘사에게 남긴다.


사실 이 책은 결혼식을 마치고 여행을 가는 다음 날 아침, 인천공항 북스토어에서 집어 든 책이다. 발리-호주를 넘나드는 긴 비행시간을 때우기 위해, 친구 릴로가 추천한 이 책을 충동적으로 골랐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이하 '할미전') 덕분의 나의 길었던 2주 간의 신혼여행은 매우 즐거웠다. 특히 호주에서는 팜스테이를 하느라 데이터가 연결되지 않는 지역에 있었는데, 덕분에 스마트폰이나 SNS에 방해받지 않고 정말 200% 할미전을 즐길 수 있었다.


엘사의 할머니는 정말 멋지다. 그녀는 뭔가 구태의연하지 않다. 늘 새로운 장난을 생각하고 7살 엘사와 소동을 벌인다. 모든 일을 보수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할머니가 자동차 '르노'를 운전할 때 무엇을 먹어야 하면, 조수석에 있는 엘사에게 핸들을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멘션 주민 모두가 싫어하는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검은색 개 '워스'를 친구라고 부르며 그에게 주기 위한 초콜릿을 챙기기도 했다. 책 속에서 할머니와 멘션 주민들은 모두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 어쩌면 그 '어떤 관계' 덕분에 모두가 멘션에 모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어떤 관계를 파헤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키포인트다) 그런데 이 멘션도 할머니가 의대에 다닐 때 포커를 쳐서 딴 것이라고. 와우.


나는 대학교 친구 두 명과 '진보적인 할머니 연대'라는 소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모임의 목표는 뭔가 세상에 지지 않고, 나이 듦에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 진보적으로 생각하고 재밌게 사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엘사의 할머니가 현실에도 있었다면 우리 모임의 정신적 지주로 모실 수 있을 거 같다. 


재작년 혼자 떠난 여행에서 우리 엄마 나이 뻘(60대?)인 일본인 '아키상'을 크로아티아에서 만나 함께 투어를 했었다. 갑자기 펼쳐진 스노클링 스폿에서 그녀는 배낭에 들어 있던 반팔티를 꺼내 입고 팬티만 입은 채 물속에 입수! 미리 준비하고 온 나보다 그녀는 훨씬 즐겁게 스노클링을 즐겼고, 그 모습은 내 두뇌 한 구석에 박제되어 남아 있다. 


엘사의 할머니와 아키상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검열해본다. 

'혹시 매년 먹을 수밖에 없는 나이에 너무 발목 잡혀 있지 않는가? 스스로보다 다른 사람의 잣대와 평가에 더 신경 쓰고 있지 않는가?' 진보적인 할머니 연대의 정신을 늘 가슴속에 새기며, 재밌는 할머니가 되는 데 들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p/s.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라는 모토로 작년 여름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진보적인 할머니 연대에서는 제1회 겨울 영화제를 열었다. 뭐 그냥 방을 하나 잡고 에어컨을 18도로 맞춘 다음 털모자를 쓰고 겨울이 배경인 영화를 골라 하루 종일 수다 떨면서 보는 작은 행사였지만, 그때의 시원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ㅋㅋ 


이번 주 우리 집에서 제1회 여름 영화제를 열 예정이다. 날씨가 엄청 추웠으면 좋겠다. 나는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을 예정이다. 진보적인 할머니들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엄청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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