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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Oct 05. 2016

폭풍우치는 밤에

온몸으로 겪은 태풍 차바. 진짜 때려버리고싶다.

제주 1일차. 살아 있는 태풍을 만났다.
밤 11시쯤 잠이 들었는데 바람이 휘몰아치고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에 새벽 2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와 이건 진짜 태풍이다. 태풍의 영향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살갗에 와 닿는 건 처음이다. 

태풍을 처음 만난 소감은 일단, 무. 섭. 다. 지금은 사택 15층 꼭대기에 머물고 있는데, 아파트만 한 거인이 집을 채찍으로 마구 때리는 느낌이다. 집이 흔들 흔들하고 전기도 가끔 깜빡거린다. 휘잉휘잉 싱~ 하는 바람 소리도 괴기스럽다.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제주 지역 방송 뉴스를 봤는데, 주요 뉴스 하이라이트 4개 중에 3개가 이번 태풍 차바의 내용이었다. 하나는 제주가 직접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또 다른 하나는 공항이 통제된다. 마지막 하나는 태풍 때문에 내일 아침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 늦춰질 예정이다. 뭐 저게 대수라고 저렇게까지 떠들어대나 싶었던 당시의 생각을 반성한다. '태풍은 정말 큰일이 맞았다. 적어도 제주에선'

자연재해로 죽을 수 있겠구나 싶다. 그동안 TV 뉴스에 비치는 전 세계의 재해 현장을 보며, 나와 거리가 먼 영화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여기곤 했는데, 그 위협이 체감되고 있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옆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연인도 아닌 제주에서 스노클링을 하겠다며 구입한 오리발뿐인데.... 이렇게 처량하게 죽을 수는 없다. 하나님 맙소사 어떻게 좀 해주세요.

천둥 번개가 치던 날은 안방으로 뛰어가 엄마 아빠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놀란 마음이 이내 편안해졌다. 엄마가 등허리에 손을 얹고 토닥토닥 몇 번만 해주면 스르르 눈이 감겼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급박한 순간인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은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스피커와 알래스카의 대자연을 담은 한 권의 책뿐이다. 망할 대자연. 

이렇게 벌벌 떨었는데 데 내일 아침 날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진다면 진짜 열받을 거 같다. 출근도 제 시각에 해야 된다면... 진짜 망할 대자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휴대폰 메모장에 계좌 비밀번호와 
금니 할당자를 지정해 적어 놓아야겠다. 

남자친
구는 아까 무서우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막상 전화를 거니까 10초 만에 끊는다. 받아준 게 어디냐 싶지만... 내일 아침에 두고 보자. 흥.
하나님.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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