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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Aug 05. 2021

다 망한 프로젝트 멱살 잡고 끝내기

서비스 기획자가 멋져 보이나요? 웃기지 마세요!  

앞으로 홍식 씨가 오너십을 갖고 잘 마무리해줬으면 좋겠어요.

어.. 음.. 네...



그때였던가.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미련 없이 사표를 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이. 여차저차 이야기가 길지만, 입사 8개월 차. 나는 회사가 장장 2년 반을 못 끝낸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아니 이건 떠맡게 됐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IT 회사에서 그것도 애자일 방법론을 지향하는 회사에서 2년 반 동안 명맥을 유지한 프로젝트는 그냥 폭탄이라고 봐도 된다. 갑자기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는 전쟁 영화의 의로운 병사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복선이었다.

3개월 뒤, 프로젝트를 끝내고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난 퇴사했다.


이 글은 전 남친을 까듯 전 직장이나 동료를 까려는 글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읽혔다면, 그동안 슬펐던 마음이 반영됐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길) 단지, 마침내 서비스를 배포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자신의 노하우를 미래에도 분명히 역경이 닥칠게 뻔한 나에게 전수해주는 비책일 뿐. 그러니 이 글의 독자는 나다. 과거의 홍식이가 미래의 홍식이에게 걱정 말라고 뭐가 어렵든 이보다 더 하겠냐고 위로해주는 편지이자 잊지 말자며 되새기는 다짐이다.


1. 회사에서 가장 불쌍한 팀을 가장 화목한 팀으로 만들기

- 힘들 땐, 박수를 치자!


2년 반 동안 성과가 없는 팀. 담당 기획자만 다섯 번 갈아치운 팀. 그게 바로 우리 팀에 붙은 꼬리표였다. 다른 팀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우리팀 프로젝트 이름} 보다는 낫지'라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카페테리아에서 종종 들었다. 우리 팀은 완충제 같은 팀이었다. 회사에서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우리 팀이 있어서 그냥 해볼 만해 보였다. '내가 000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 눈에는 측은함이 어렸다. '왜, 하필, 재수도.... 없.. ' 이런 느낌이었다.  개발자들은 주눅 들어 있었고, 늘 슬펐다. 2년 반 동안 상용 배포를 못하고 테스트 서버만 뱅뱅 돌리고 있는 우리 팀은 열심히 일했지만 티가 안 났다. 실제로 서비스가 돌지 않으니 유관부서들은 테스트 케이스만 돌리면서 엣지의 엣지 케이스만 고고학자처럼 발굴해 제보하기 일쑤였다. 실제 발생할 확률은 5%도 안 될 거 같은데... 테스트 서비스만 고치며 하루를 다 보냈다.


팀을 맡은 후, 나는 가장 먼저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고민했다.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긍정의 파워를 뭐 어떻게든 불어넣어 줘야 했다. 나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본능적으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고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라는 이 시대 최고의 띵언을 머릿속에 새기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오해하지 말길, 진짜 물리적인 손뼉. 그래 그 박수다. 우리 팀 누군가 모기를 잡아도 난 박수를 쳐줬고, 개발자가 머리를 멋지게 볶고 왔을 때도 박수를 쳐줬다. 박수는 옮는다. 옆에서 박수를 힘차게 치고 있으면 왠지 나도 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 팀은 다 같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넘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니 다 같이 웃었다. 그냥 그 정도로도 사람들은 힘을 냈다. 예전에 무슨 건강 프로그램에서 하루에 박수를 몇 번 이상 치면 엔돌핀이 나와서 건강에 좋다고 했는데, 정말인지 팀에는 활기가 돌았다.


옆 팀에서는 저 팀에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묻기 일쑤였다. '00님이 모기를 잡았어요.'라고 답하면 질문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몇 주 후, 우리 팀은 회사에서 제일 분위기 좋은 팀이 돼 있었다. 실제로도 조금은 재밌어졌다. GDP는 낮지만 국민 행복지수는 가장 높은 '방글라데시' 같은 팀으로 재포지셔닝됐고 심지어 누군가는 저렇게 재밌게 일하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장난명. 박수칠 때 떠나라. 세븐틴의 박수. 박수무당(은 아니고)

단지 왼손과 오른손이 부딪히는 마찰음인 박수는 꽤나 힘이 셌다. 그렇게 이어진 박수는 결국, 배포 당일 날 밤을 새울 때까지 이어졌다.


2. 거절은 프로젝트의 동력

-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하자!


왜 이 서비스는 2년 반 동안 못 나갔을까? 프로젝트를 맡으며 든 가장 큰 화두였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2년 반은 매우 긴 기간이다. 난 2년 반 전에는 30대 초반이었고, 피부 탄력이 지금보다 좋았으며, 더 귀여웠다(?) 그 긴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고민을 했을 때, 재직 기간이 1년이 안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프로젝트의 역사는 대대손손 전해져 온 구전으로만 들어야 했는데, 자료 수집의 노력 끝에 내린 결론은 '거절을 못했구나.'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영업, 운영, 법무, R&D 등 다양한 부서가 엮여 있었다. 각 부서의 대표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정상 회담을 했다. 입사 직후, 회담을 처음 참석했을 때, 놀랍도록 팽팽한 긴장감과 냉랭한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혔다. 그동안 운영 시스템에 불만이 많았던 각 대표자들은 개선점과 희망사항을 쏟아냈고, 빚이라도 받아 내겠다는 기세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답변을 달라며 닦달하기 일쑤였다. 기획자들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하기 위해 뇌를 비틀어 짜냈다. 숨 막히는 회의가 끝나면, 우리 손에는 길고 긴 요구사항 리스트가 쥐어졌고 이 리스트를 다시 개발에 전달해야 했다.


여기가 병목이었다!

요구사항을 받았다고 반드시 다 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필요한 것. 없으면 서비스 유지가 어려운 것은 TO-DO에 추가해야 하지만,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정도의 요구사항은 MVP(Minimum Valuable Product) 출시 후, 우선순위에 맞춰 순차적으로 진행하면 된다. YES를 잘하면, 좋은 사람이 되지만 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프로젝트 마무리를 위해 그리고 팀의 정상화를 위해 No무새가 되기로 결심했다.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미안함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중에 하면 되니까!


이후, 유관부서 정규 미팅에서 나는 '그건 못합니다.'를 아주 잦은 빈도로 얘기했다. 각 부서의 정상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나의 상사에게 '홍식님 넘 별로다. 싸가지 없다.'를 돌려 돌려 말하곤 했지만, 그러든 말든 일단 신경 껐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거둔 터였다. 나의 팀원들은 지금 있는 스펙으로도 죽어나가는데, 나 혼자 선량한 시민일 수 없다. 싸가지 없는 마피아여도 일단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은 개발자들의 거절을 거절했다. 업무가 과중하니 한번 세게 가지치기를 한 업무인데도 개발자들은 힘들다며 다시 한 번 일을 잘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안팎으로 단호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 거절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라 지하철에서 껌도 잘 사고 백화점 판촉사원의 말에도 잘 넘어가고 친구의 친구가 설계사라며 소개해준 탓에 월 20만 원씩 종신 보험도 가입했다. 심지어 잠시 받았던 상담 선생님은 '홍식 씨, 거절을 못해서 마음이 아픈 거예요. 거절도 연습이 필요하니 꼭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거절을 해보세요.'라고 조언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거절해야 한다. 거절하는 마음도 편치 않았지만, 거절을 반복한 덕에 작업 범위는 일단 안정되었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됐든 서비스는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회사를 나왔다.


3. 운동의 괴로움으로 스트레스 연습하기

-  머리가 복잡할 땐, 힘든 하루가 예상될 땐, 일단 몸을 조져라!


난 개복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기 직전까지 간다. 특히 하기 싫은 일을 별로인 사람들과 해야 한다면 잠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좀비가 된다. 그 기간이 1-2주 내외라면 그냥 악으로 깡으로 잘 버티지만, 두 달 이상이라면?? 난 엉엉 울면서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주님, 품으로 절 데려가소서...라고 해도 백번 할 찌질이다. 그런데 사실 이번 프로젝트가 그랬다. 프로젝트를 리딩하라는 어명을 받은 시기는 3월. 실제 배포는 7월. 장장 4개월을 엄청난 압박에 살아야 했다. 아이고 아부지..


그동안 깨작깨작 발레니 체형교정 필라테스니 가벼운 운동은 꾸준히 해왔지만, 이번에는 운동에 대한 자세를 바꿨다. 헝거게임 출연에 당첨된 듯 회사 앞 크로스핏을 끊고, 매일 아침 5km, 30분 연속 달리기를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박수가 증가하고 열과 땀이 난다. 혈압이 올라서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어 진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몸의 증상은 과격한 운동에서의 증상과 몹시 유사하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난 헬창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30분을 풀로 뛸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런데이라는 앱을 사용해 30분 달리기를 할 수 있도록 8주를 연습했다. 음성 코치 아저씨가 이런저런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는데, 가장 행복했던 말은 '30초 남았습니다! 집중하세요.'였다. 트레이닝 이후 30분을 풀로 뛸 수 있게 되면서 진정한 고통의 순간이 열렸다. 나는 아픔을 잊기 위해 걸그룹 노래를 들었고, '뛰지 않는 동물이 있는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여겨질 때는 플랭크를 하라는 유퀴즈 할아버지의 말에서 플랭크를 러닝으로 바꾸기도 했다. 26분 정도 뛰면 가장 포기하고 싶어 지는데 그때마다 이 것을 포기하면 프로젝트도 포기하게 될 거야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나머지 4분을 참아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얼굴이 달궈진 쇠처럼 빨개지면 달리기는 끝났다.


달리기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면 지옥문이 열렸다. 계속되는 이슈와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신저. 자료를 준비하라는 난 데 없는 명령.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들. 하지만 난 참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앉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박수가 뛰어도, 숨이 잘 안 쉬어져도 아침에 맛보았던 극한의 러닝에 비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더 좋은 것은 화낼 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한바탕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왔기 때문에 분노할 힘도 없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밤 10시쯤 귀가하면 엄청 잘 잤다.


화, 금 저녁에는 크로스핏 체육관을 갔다. 약 6명 정도의 사람들과 바닥을 기고 천장에 매달렸다. 아령과 케틀벨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로잉머신을 탔다. EDM 같은 노래가 나왔고, 선생님은 심박수 190부터 지방이 활활 탄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내가 너무 힘들어 원망스러운 마음에 '선생님 심장이 터질 거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터진 사람 못 봤어요.'라고 차갑게 대답했다. 그의 영혼 없는 '화이팅... 화이팅...'을 들으며 나는 근육을 키웠다.


근육은 나를 버티게 했다. 야근을 매일 같이해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미 녹다운됐을 텐데 체력이 올라오니 그냥 해볼 만해졌다. 재미없는 회의도 그냥 근육으로 버틴 거 같다. 지루해질 만했을 때 나는 내 등근육을 느껴보거나 승모근을 내리는 연습을 했다. (등근육은 아직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건강한 신체에 왜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딴생각을 할 힘이 없다.) 전처럼 입맛을 잃지 않고, 운동을 하기 위해 샐러드나 도시락 같은 것들도 잘 챙겨 먹게 되었다.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을 텐데 운동한 게 아까워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정신을 잘 차리며 살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몸무게는 10kg 정도 빠졌고, 내장지방 레벨은 3이나 줄었다. 근육량도 꽤나 많이 늘었다.

운동에 재미가 생겼고 퇴사한 지금도 매일 30분씩 뛴다. 회사 근처였던 크로스핏 체육관과는 아쉽게도 작별했지만 나는 새로운 직장 근처에서 체육관을 등록할 예정이다.

뭐 이 프로젝트에 작은 수확이랄까.


4. 필요한 것에 집중하기

- 시간과 마음을 아끼자


작은 성취는 습관이다. 성취를 해본 사람만이  다른 성취를 일궈낼  있다. 우리 팀은 2  동안 성취없었던 팀이다. 질책과 동정만 받았던 .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솔직히 내가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기 위해서 나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포트폴리오에   동안  했는지  줄이라도 써야   아닌 ..) 론칭   . 나는 모든 팀원을 회의실에 모아 놓고 '우리는 반드시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며, 끝내기 위한 액션 아이템은 이렇고, 세부 전략과 일정은 이렇다!'라고 선언했다. 그동안 지연만 있었던 '데드라인'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의례 밀리겠거나 했던 팀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밀릴 가능 성이 있나요?' 누군가 정적을 깨고 물었을 때, '그러고 싶지 않다.'라고 난 대답했다. 그렇게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며칠 뒤, 누군가 회사 카페에서  '홍식님 혼자만 굉장히 급해 보이시던데요. 너무 쪼는 거 아닌가 싶은데...'의 뉘앙스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우리 팀원 중 한 명이 티타임에서 한 얘기였다. 나를 좋아하는 동료인 그는 나 대신 엄청 분개한 거 같았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자는 이야기가 기분이 나빴을까? 그럼 언제까지 이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해보니 맞다. 난 울타리를 쳐놓고 안전하게 있던 팀원들을 벼랑 끝으로 밀었다. 아니 함께 끌어안고 뛰어내렸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날아오를 것이고, 할 수 없다면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뒷담화는 솔직히 실망스러웠지만, 내려놓기로 했다. 이미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 소리의 파동은 주워 담지 못한다. 나는 거기에 마음과 시간을 쓸 수 없고 프로젝트를 끝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 이후, 팀원들이 지쳐 보이면 달달한 공차를 주문받아 돌리고, 간식을 사다 나르 긴 했지만 불필요한 시간을 함께 하지는 않았다. 특히, 주어진 일을 제대로 못해낸 상황에서 자기 위로가 필요해 술을 마시자는 제안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쓴다면 2년 반과 같은 시간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마음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슬럼프가 온 팀원을 위해 1on1을 하고, 필요한 피드백을 전달하긴 했지만, 나는 그들의 엄마는 아니었다. 정도를 지키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개발자는 감정적으로 달래주기보다는 개발 리더에게 상의하고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근거로는 업무적인 성과와 속도를 들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프로젝트 속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화목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계했다. 회사는 일을 하러 온 곳이니 일을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수위를 지키는 일은 어려웠지만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우린 마침내 일을 마무리했다.


+

배포 1주일 전.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하얀 중절모를 쓰고 나와서 칠갑산을 구성지게 불러주고 가셨다.

잠에서 깨어나 눈물을 닦았다. 느낌이 좋았다. 잘 될 것 같다는 낙관적인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앞으로 괜찮은 회사를 다니려고 일을 하지 말고, 즐겁게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다니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서 내가 즐거울 수 있을까? 답은 No.

퇴사를 하고 가슴 뛰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포 당일.

퇴사 일정을 상사와 협의했다.


그리고 퇴사.

그동안 일에 대해 냉담한 척했던 내 마음을 다시 돌아보고, 일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며 좋은 철학과 가치, 그리고 열정이 넘치는 곳에서 나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부족한 나와 함께 일해주며, 알게 모르게 상처 입었을 팀원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나의 결정을 지지해준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랑을 다 모아 보낸다.


그리고 할아버지. 다음에는 숫자를 부탁하고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내 동생은 늘 멋진 롤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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