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피그-J.K. 롤링
회사 근처에는 큰 규모의 알라딘 중고 서점이 있다. 나는 일이 좀 안 풀리거나 잠깐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그곳으로 가서 고객이 방금 맡기고 간 책장을 살피곤 한다. 어떤 날은 별 의미 없이 알라딘의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책 제목만 잔뜩 읽은 채 사무실로 돌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운 좋게 평소에 관심 있었던 책을 득템 하기도 한다.
유독 사무실 공기가 탁했던 오후, 쏟아지는 졸음을 극복할 겸 나는 슬쩍 밖으로 나와 알라딘으로 향했다. 평소와 같이 책장을 살피는 데 J.K. 롤링 지음이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한 해리포터의 창조자.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어쩌면 나의 일부는 해리포터의 세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녀의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곧 그녀의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피그는 잭이라는 소년의 애착 인형에 대한 이야기다. 잭은 그의 10년 남짓한 인생 통틀어 사랑을 다 받친 돼지 인형 디피를 감정적이고 우연한 사건으로 고속도로에서 잃어버리게 된다. 그 사건을 발생시킨 새아빠의 딸, 양 누나 홀리는 미안해하며 새로운 돼지 인형을 선물하지만, 잭은 매우 낙심하고 분노한 상태. 잭의 분노를 참다못한 새로운 돼지 인형은 그의 원조 애착 인형 디피를 찾기 위해 크리스마스이브의 힘을 빌려 잭을 데리고 분실물의 나라로 향한다.
분실물 나라의 분류 체계는 두 가지다. 1. 그 물건이 올바른 위치에 있는가. 2. 해당 물건이 얼마나 애정을 받았는가. 1번의 관점에서 분실물 나라는 '잘못 둔 곳'이라는 임시 장소를 생성한다. 예를 들어, 안경이 놓여야 하는 올바른 위치는 안경갑 안이지만 주인의 실수로 선반 위에 놓이게 될 경우, 안경은 잘못 둔 곳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잘못 둔 곳에 머무는 동안 주인이 찾지 않으면 그 물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2번으로 변경되고 애정의 정도에 따라 '별로 안 찾는 물건 마을' , '찾고 싶은 물건 마을' , '슬퍼하는 이 없는 황야' , '간절히 찾는 물건 도시'로 물건은 각각 배치된다. 주인의 기억력이나 생각에 따라 물건은 각각의 마을로 이동할 수 있고, 갑자기 구원받을 수도 있다. (주인이 갑자기 찾아내거나 새로운 주인이 등장한다면)
'슬퍼하는 이 없는 황야'는 그야말로 그냥 있으나마나한 물건들이 굴러다니는 곳인데, 이때 루저라는 분실물 나라의 절대 악이 이런 물건들을 가져가 잡아먹는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물건을 사랑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버려진 물건들은 없어져야 마땅하다며 원기를 빨아먹고는 불에 태워버리는 가혹한 존재다.
어떠한 논리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던 물건들은 다 부서지거나 망가져서 실체가 사라지더라도 '사랑받은 물건 섬'에 가게 되고, 물건의 영혼들은 그곳에서 평생 행복과 사랑을 느낀다. 이 섬은 루저가 접근할 수 없다. 예상했겠지만 잭이 온 맘을 다해 사랑한 디피도 이곳에서 만난다.
아름다운, 낙관주의, 행복, 희망, 욕망, 권력, 추억, 원리원칙과 같은 심리적인 요소들도 분실물이 될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되찾기 더 어렵다. 이들은 늘 평생을 분실물 나라에 머물 수도 있을 거라고 각오한다.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끝나기 전까지 잭은 다시 인간세상에 돌아와야지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시간적인 제한 안에서 잭과 새로운 돼지 인형의 모험을 담아낸다. 해리포터와 같이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웅장한 세계관은 아니지만 귀엽고 깜찍한 동화가 분실했던 동심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물건들과 마음 상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내가 사랑했던 물건들은 모두 사랑받은 물건 섬에 가 있을까? 사랑받은 물건들은 대체로 브랜드나 제조사명이 아닌 본인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나의 첫 차 빨간 마티즈 닭강정도 거기서 만났으면 좋겠다. 대학생 때 열심히 과외를 해서 모았던 400만 원으로 샀던 나의 첫 차. 뒷 좌석 창문을 손으로 돌려서 열어야 했지만, 나의 세계를 넓혀준 멋진 닭강정. 책을 읽은 후 닭강정이 보고 싶어진 건 분실했던 동심을 조금은 다시 되찾아서 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