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삶 자체가 생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생각을 했다. 여전히 생각의 체계가 없는 건 아쉽지만, 모든 생각을 하나로 모아 결론을 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여정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수십 가지 생각의 퍼즐을 담는 퍼즐판을 얻었음을 항상 기억하고 멋진 퍼즐을 완성해보자.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자 삶이 심플해졌다. 지금보다 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열정이 다시 부활했다. 세상이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제주도나 서울에 살든, 현업 복귀나 새로운 가치 추구는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아졌다. 목표를 이루는데 더 적합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된다. 반드시 실현하고 싶은 꿈이지만 설령 이루지 못해도 그리 슬프진 않을 것 같다. 목표가 너무 멀어 제 자리에 멈췄던 적이 많았다. 뛰어도 좋고, 걸어도 기어가도 좋으니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뛰는 날이 반드시 온다.
지금보다 더 부지런하며 나태하지 않고 치열하다고 해서 지금의 자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이번 여정에서 미래에 갇히지 않으며, 순간순간을 느끼고 호흡하며 살아간다면 이번 여정은 성공적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지를 몸소 깨닫는다. 곡식을 기르듯 현재를 사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싶다. 멋진 풍경을 보고, 멋진 사람과 대화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 순간의 생생한 오감을 미래에 대한 고민과 생각으로 흐리지 말자. 이루고 싶은 목표만 생각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결실을 만든다.
(이미 이정에게 이실직고했지만...)
하와이는 9년 전 사귀던 여자친구와 여행 왔던 곳이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헤어졌다. 정우도 이성을 최대한 많이 만나고, 아파하며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한다.
“나는 정우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대학도 직장도 아니라 생각해.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금부터 책 보며 공부한다고 좋은 여자, 정신적 육체적 궁합이 모두 일치하는 여자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운도 많이 작용한다. 만약 정우가 신경질이 조금 덜한 이정이 같은 여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 전 재산의 일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엄청 많은 여자를 사귀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현장에서의 배움을 얻을 만큼은 만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로 돌아가 “제발 병신 같은 짓 하지 말라”싶을 만큼 오금저리게 행동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여자에 대한 이해가 없음은 물론이며, 여러모로 안타깝고 어리숙했던 미혼의 나였다. 그러한 흑역사가 밑바탕이 되어 지금의 아내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하와이는 아프고 잊고 싶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 이정이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배움의 장소'다. 정우도 그런 경험을 하며 자신과 최대한 잘 맞는 여자와 결혼하길 간절히 바란다. 중요한 건 빠를수록 좋다. 황홀한 청춘 못지않게 불혹의 삶도 중요하다. 한 번뿐인 청춘이라지만, 조기 결혼으로 치러야 할 기회비용은 자녀의 졸업과 함께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다.
만약 아내를 일찍 만나, 정우가 곧 대학 졸업이라면? 내 불혹이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학창 시절에 의미 있는 아픔과 경험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22-3살쯤 결혼해서 자녀를 다 키워놓고 남은 여생을 편히 사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 된다. 여자 입장에서는 늦게 결혼하더라도 나 정도 되는 남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굳이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겠다.
정우에게 바라는 건 그저 건강하고 착하게 살며, 현명한 여자를 만나, 돈에 대한 제대로 된 생각을 갖는 것이다.
이번 여정의 가장 큰 목표 중하나는'미래 삶의 설계'다. 온전한 정신과 활발한 육체 활동이 가능한 50년에 대한 설계.
5년, 10년이 아닌, 50년의 긴 호흡은 차원 다른 깊이 있는 성찰과 함께 인생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한 마디로 노는 리그 자체가 다르다. 50년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겠나 싶지만, 한번 매수하면 평생 보유한다는 투자 철학으로 종목을 고를 때와 같다. 여정을 떠날 때 10년을 내다보며 세상의 변화와 그에 편승해 성장할 기업을 찾으려 했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50년 이상 지속 성장할 기업을 찾고 있다. 1년 뒤도 알기 힘든 세상에 미쳤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성장을 이뤄낸 훌륭한 기업들이 있기에, 50년 이상의 초장기 투자라면 그 기업들은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여정을 마치고 나서 현업 복귀와 새로운 커리어 도전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안에서도 여러 갈래로 나뉘겠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뭔가 필요하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잠자는 시간 빼고 이 일만 했을 때, 50년 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평생 업으로 삼는다."
정리가 돼 가는 느낌이다. 내 심연을 들여다보고, 현실적인 수요나 잠재성도 살펴보자. 아무리 일이 재밌어도 보상 수준이 낮다면, 그 일의 영속성과 하고자 하는 욕구 역시 낮아질 것이다.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하지 않고, 남들이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을 자신 있고, 이정이와 정우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긴 호흡으로 바라보자. 나이가 지긋해져도 일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면, 여생을 더 재밌게 살 수 있다. 편안함도 하루 이틀이다. 익숙해지면 지루하고 무료한 삶이 된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게 쉽지 않기에 용기를 내야 한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로운 영혼,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지위에 초연해져야 한다. 마음이 약해지고 나태해질 때면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쓴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자. 나태해져 이 글을 읽고 다시 각성하는 두려움이 들어도 꾹 참고 읽자. 반복될수록 나태함은 줄고 깨달음과 행동은 더 강한 욕구가 될 것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이다. 나와 이정이의 건강, 정우의 건강. 꼭 기억하자. 초심을 기억하자. 이번 여정은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전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하와이.
누구나 한 번쯤 여행하고 싶은 태평양 최고의 휴양지. 오늘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영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멋진 여정이 되도록 하자.
시드니와의 시차로 하루를 벌었다. 즉 돈 나갈 일이 하루 더 늘어났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켠다.
“또 시작한다. 또 시작한다. 아빠가 또 노트북 켜네..”
어른이나 할 소리를 정우가 한다. 나중에 어떤 말로 우리의 게이지를 올릴지 상상하기 어렵다.
아침 6시 무렵, 시원한 바람이 나를 먼저 반긴다. 다소 흐릿한 날씨가 이어지다 이내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영락없는 여름이다. 한 낮이 되면 얼마나 더워질지 사뭇 기대감이 크다.
“나는 그래도 더운 날씨가 좋아” 추웠던 시드니를 떠나 따뜻한 하와이에 도착하니 이정이가 그저 해맑다. 나도 정우도 더운 날씨에 수영하는 걸 좋아한다.
아직까지 하와이 계획은 거의 제로다. 차차 계획을 잡아가는 재미를 즐겨야 한다.
시드니 공항에서 정우 캐리어의 바퀴가 파손되었다. (호치민 시장에서 12,000원에 구매한 캐리어다.)
“하와이 가서 하나 사자. 오래 잘 썼다”
도착하자마자 횡재다. 보험사인 Assist card에 사진 찍어 보냈고, 항공사의 배상을 기다리면 된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냐 묻길래 내년 8월이라니,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묻는다. 그리고 동료에게 신기하다는 듯 우리 얘기를 꺼낸다. 그 동료가 Wow 란다. 우리 여정이 특이한 모양이다. 다들 놀란다.
처음 사줄 때도 얼마나 쓰겠어? 싶었는데, 그래도 2달을 잘 버텨주었다. 아이가 11kg의 짐을 나눠들 수 있음에 감사하자.
밤 비행기
저비용 항공과 국적기 항공의 퀄리티는 많이 다르다. 티켓 예매 시 왜 항공기종을 표기하는지, 기종에 따라 퀄리티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대부분 모를거다. 나도 이번 경험 이후부터 비행기 기종을 반드시 확인하게 되었다. 저비용 항공사나 국적기 비행사의 자회사라도 국가 간 이동 시에는 고급 기종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저비용 항공일지라도 기종만 잘 뽑으면 안락한 여행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좌석 위치인데, 시드니-하와이의 10시간 장시간 비행에서는 젯스타의 가장 뒷좌석을 선택했다. 예매대행 사이트의 경우랜덤으로 배정받거나, 일찍 공항에 도착해야만 원하는 좌석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 항공사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좌석 지정이 가능하다.
3-3-3 배열의 마지막 중간 3자리 양옆 좌석 없이 비어있는 좌석을 예약했다. 결과는 대성공!!
갤리와 화장실이 뒤쪽에 있고, 양 옆의 좌석이 비어있는 맨 뒷줄.
바로 뒤 화장실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와 소음이 제법 있지만, 비행기 고유의 소음으로 크게 인지하지 못했고, 밤 비행기 특성 상 소등 이후엔 인적이 확연하게 줄었다. 한마디로 Private 했다. 양 옆이 비어있고, 뒷자리 신경을 아예 안 써도되니 심적 평온함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행 티켓 역시 맨 뒷좌석으로 지정했는데, 아주 좋은 선택 같다. 여정 중 가장 장시간의 비행이라 걱정한 것과 달리 역대급 편안함으로 끝났다. 초반에 정우가 졸린지 생떼를 부렸지만 이내 안정되어 곧 잠들었다. 이정이도 안대를 껴고 자고 일어나서는, 여유가 있는지 마스크팩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였다. 비몽사몽 화장실 가려던 사람에게 공포스러울 텐데...
“지금 어때, 피부가 뽀송뽀송 해졌지?기내가 얼마나 건조한데.”
자기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 지 묻는 게 30번은 된다. 이런 질문은 정말 안 했으면 좋겠다.
“오빠, 내 볼이랑 정우 볼을 만져봐. 어때 똑같지?”
많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생각을 해서도 안된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정해져 있어야 한다.
“응. 그런 것 같네.”
호놀룰루 공항 39번 기둥 앞에서 첫 번째 숙소 호스트 Young을 기다린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놓쳐 급하게 픽업을 부탁드렸다. 참 친절하신 분이다. 그분의 숙소를 2박만 예약했기에 다른 숙소도 알아봐 주실 수 있는지 여쭈었는데,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저렴한 숙소를 소개해 주셨다. 선교사님과 보내는 날이 기대된다. 특별한 경험은 늘 특별한 추억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