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 아내의 신경질에 대처하는 방법

400일의 여정이 끝나면, 나는 철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by 홍어른

빨래에 진심인 그녀의 신경질

아내는 워낙 깔끔해서 반쯤 결벽증이 있을 만큼, 청소와 빨래에 진심이다. 그녀를 위해 반드시 세탁기가 있는 숙소를 찾아야 한다. 지금 머물고 있는 호텔에는 코인 세탁기가 없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많을 테니, 내일 가는 게 어떠냐고 얘기하려다 참았다. 이미 어제부터 전쟁에 나가는 장수처럼 빨래방을 찾고 있었다.


“망할 구글맵. 훨씬 멀고, 갑자기 사라지고 !!!
날씨는 푹푹 찌고...옷은 덥고,
하필 선글라스와 모자도 안 가져가고!!!
정말 짜증나!!!”


그래도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근처 <Phils coffee>에 갔던 모양이다. 그녀가 샌프란에 도착했을 때부터 가고싶다던 샌프란 3대 카페 중 하나다.

“그래도 Phils에도 갔으니까 좋았겠네~”

“맞아요. 마크주커버그도 내가 마신 커피를 마신대요. H언니가 알려준 레시피가 엄청 맛있었는데, 아까 정말 더웠거든. 왜 아이스를 안 시켰지? 쪄 죽을 것 같은데 뜨거운 커피나 마시고, 바보 같은 하루야.”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기에 그녀의 신세한탄을 여유롭게 들을 수 있다. 그녀가 오롯이 결정했으며, 내가 관여한 바 없기에 여행 이후 처음으로 마음 편히 그녀의 신경질을 감상했다. 숙소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숯불 위 고기처럼 그을려 있다. 얼마나 탄건지.. 실실 배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수 밖에...


왼쪽부터 <sightglass coffee>, <Philz>, <blue bottle>는 '샌프란 3대 카페'로 불린다. 샌프란시스코는 맛있는 커피들이 많다.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블루보틀도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에서 시작됐다.

코인세탁기에 빨래를 넣어놓고 난 뒤에는 여유가 생겨 샌프란시스코 감성이 가득한 벽화사진을 찍었다.





아빠와 아들 둘이서 보내는 하루

아내의 컨디션이 나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만 숙소를 세 번 옮겼고, 거리에 수많은 홈리스를 신경 쓰며 정우케어하느라 이래저래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빠, 오늘은 정우랑 둘이 외출하면 안 될까? 나는 좀 쉬는 게 좋겠어요.”

그녀를 사랑하기에 원하는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지만, 솔직히 아내없이 다니는 게 겁난다. 나중에 직장에 데려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붙어있는 시간이 1년 더 지나면 혼자 다니기 힘들 것 같다. 내심 정우가 엄마랑 같이 가겠다고 말해주길 바랬지만, 아빠와 단둘이 나가겠단다. 엄마로부터의 독립이 조금씩 가능해지고 있다.

둘만의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려면 달콤한 유혹이 필요하기에, 피셔맨즈와프 근처 오래된 오락기를 모아둔 'Musee de Mechanique'에 가기로 했다. 햄버거를 사 먹고 오락실에 갔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오락실에 방문한 아들의 눈이 돌아간다. 오늘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락하러 왔나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총 쏘는 게임이 있어 정우가 권총을 들고 막무가내로 쏜다. 5살 아이에게 저런 게임을 시켜도 되나 싶지만, 남자라면 총쏘기 좋아하는 유전자가 있다. 개구리 혀로 동물쓰러트리는 게임을 할 때면, 조이스틱을 조준해 목표물이 쓰러지는 순간에 저 어린놈이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자극적인 게임을 접하지않길 바라지만, 그 경계가 자꾸 느슨해진다. 녀석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내가 힘들다.

이정이가 혼자서 충분히 쉬었는지, 얼굴이 밝다. 그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의미 있다.


오래된 유물(?)부터 게임기들이 모여있다. 25센트 동전만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클래식한 외관이 멋스러운 케이블카.


케이블카에서의 특별한 경험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의 특별한 점은 멋들어진 외관도 한몫 하지만, 야외석 기둥을 잡고 바람을 만끽하며 서서 갈 수 있다는 거다. 대도시 대중교통수단 중 야외 기둥에 매달려 서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움직이는 클래식한 케이블카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달리는 건 정말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탑승을 원하는 이들이 많기에, 한번 타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이들 대부분 관광객으로 다들 기분이 좋기에, 모든 것에 관대하다. 긴 기다림조차 즐기고 있다.


기다리는 중, 앞에 줄 서 있는 젊은 남자 2명이 아까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거슬리는 멘트는 아니고, 그냥 엄청 신 난 모양이다.

'Wow!!! yeah~~!! All aboard~~'

'Oh my god!!! Nice!! Amazing~~!!!!'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새 지들끼리 눈을 마주치고는 낄낄대며 웃는다. 드디어 케이블카가 도착했다. 서둘러 자리를 찾는데, 야외를 바라보며 앉는 명당 두 자리가 비어있다. 웬 떡이냐 싶어 앉았으나, 소리를 질러대던 두 남자가 우리 좌석 앞에 서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시끄러워 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신이 난 그들은 우리가 앉자마자 바로 이것 저것 말을 건넨다.


"My daughter likes a lot BTS, her room is full of BTS photos. She likes 영국.”

이정이가 교정을 해준다. “His name is 정국.”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소리를 지르다시피 낄낄대며 대화를 한다.

“혹시 마약한 거 아닐까? 아니면 술을 엄청 마셨거나. 진짜 시끄럽다. 귀 아파.”


30대로 보이는 두 사내는 남들 시선이나 배려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소리치며 안부를 묻는다. 그들은 정우가 여정 내내 즐겨하는 "손 흔들어 인사하기"를 시전한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반응이라도 해주면 더욱 신나서 함성을 지른다.

시간이 흐르자, 케이블카에 탄 승객들도 경계가 풀리며 다들 미쳐간다. 어느새 반대편 좌석에서도 함께 소리를 지른다. 점점 함성소리는 커지고, 다들 미쳤다. 우리도 그 소리에 합류해서 즐기기 시작했다. 길가의 행인 중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성소리는 더욱 커진다.

샌프란에서 수많은 케이블카를 경험했지만, 이렇게 유쾌한 경우는 처음이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케이블카 운전기사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자신의 직업이 얼마나 뿌듯할까?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 행동이 비난받지 않을까, 호응을 얻지 못할까, 남들에게 피해주면 어쩌나 걱정하며 살기에 오늘 그 두 남자처럼 살맛나는 경험을 포기한다. 혹시라도 누군가 강압적으로 제지했다면, 오늘의 즐거운 해프닝은 없었을 거다. 모두의 기억에 생생히 남을 만큼 행복한 추억을 선사했다. 케이블카를 내리는 순간까지 크게 웃을 수 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케이블카 맨 앞 좌석에 앉아있던 정우는

“아빠, 정말 웃겨. 하하하. 저 삼촌들 너무 웃겨. All aboard~~”를 따라 한다. 예전 같았으면 큰 소리를 지르는 상황을 무서워했을 거다. 어느새 의젓해져 함께 즐기는 모습이 아가 티를 완전히 벗었구나 싶다. 본인도 차분하게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방법이 있지만, 정답은 없다. 미래로 가서 오늘 케이블카에 있었던 장면들을 보여주며 이 경험을 택하겠느냐를 묻는다면, 대부분 즐거운 이 경험을 선택할 거다. 즐겁게 살아가는 것. 어쩌면 삶의 정답 중 하나다.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서 페리를 타고 소살리토로 향한다. 괜히 '캘리포니아 속 유럽'이 아니다.



소살리토의 신경질

샌프란 북쪽에 위치한 'Sausalito' 소살리토는 '미국 속 유럽'을 연상케 하는 예쁜 집이 언덕에 촘촘히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이정이는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나파밸리와 소살리토를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다. 드디어 소살리토에 왔건만, 그녀는 이곳에 신경질 내러 온 듯하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차가 없으니 예쁜 집이 몰려있는 높은 언덕에 갈 수가 없네, 왜 바다를 바라보며 베이 쪽으로 걷지 않느냐, (딱 봐도 철조망으로 막혀서 걸을 수가 없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걷기만 할 거면 왜 왔느냐는 둥 내 기준에선 이해할 수 없는 신경질이지만 그녀를 사랑하기에 최대한 참아야 한다. 나도 가끔 짜증 내지만, 그녀가 100이면 나는 3이다. 점심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도 가볍게 먹고 싶은 마음에 크램차우더를 주문했는데, 그걸로 식사가 되느냐? 왜 화가 났느냐? 식사가 나오기 전 질문을 쏟아낸다. 나는 아주 평온하고 멀쩡한데... 하지만, 그녀를 이해하려 한다. 멋진 곳에 왔음에도 남편이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구름 한 점 없는 뜨거운 오후, 정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건 노동에 가깝다. 아직까지 렌터카부터 추후 일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했고, 뜨거운 길 한가운데 서서 렌터카 예약을 위해 young 님과 소통해야 하니, 그녀의 신경질은 펄펄 끓는 물처럼 점점 과격해진다. 웬만한 일정을 미리 정하고, 숙소와 렌터카까지 세팅했어야 하지만, 내 입장에선 쉽지가 않다. 생각할 게 너무 많다.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하는 게 최고의 방패다."


이번 여정은 그녀의 신경질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나를 더욱더 강하게 단련한다. 아마도 이번 여정이 마무리되면 나는 철권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미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내를 기르는 수련의 의미도 크다. 감사하자. 감사해하는 삶의 소중함도 함께 배운다.

정우가 정말 많이 커서 싸움을 중재하려 한다.

“엄마와 아빠는 왜 싸우는 거야?
도대체 왜 그래?”


소살리토의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멋진 베이를 배경삼아 캘리포니아 쇼비뇽블랑 한 잔 하며 화를 다스려본다. 대부분 미국 레스토랑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놀거리가 준비되어 있어,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고달프지 않다.
아이의 얼굴만큼 커다란 젤라또, 너무 더운 날씨에 윗 옷은 진작에 벗어던지고, 런닝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신경질을 많이 냈지만, 소살리토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롬바르트 거리 그리고 우범지대 텐더로인

드디어 롬바르트 거리에 왔다. 넷플릭스 필아저씨 프로를 본 뒤, 아내가 롬바르트 노래를 불렀다.

“맨날 다음에..
다음에 가자면서 정작 가보고 싶은 곳에
가보지도 못하고..”


소살리토에서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맑다. 인생은 참 쉽다. 소중한 사람이 원하는 걸 실현해 주면 편안해진다. 꽃이 피어있는 길이 꼬불꼬불한 길 사이를 자동차들이 천천히 내려온다. 우리는 차가 없으니 걸어 올라간다. 그게 전부다. 어제 이 문제로 다퉜는데, 내가 옳았다.

우리의 여정은 특별하기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꽃들이 소복하게 예쁘게 피어있고, 대도시에서 이런 꼬부랑길을 경험하기 쉽지 않기에 그녀 의견을 충분히 이해한다. 더구나 거의 모든 여자들은 꽃을 좋아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카드 Muni 7 days 티켓이 어제자로 만료된 김에 산책 겸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구글 지도를 따라 걷던 중 뉴욕의 할렘가인가 싶을 만큼 좁은 인도에 홈리스들이 수두룩한 우범지대 '텐더로잉'에 들어섰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이 길을 무사히 지나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다.

홈리스에도 별의별 유형이 있고 다양하다. 한국에도 노숙자가 있지만,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짐이라 규정하기에 그 쓰임새가 있을까 싶은 것들이 지저분한 옷과 비닐로 감싸져 있고, 술병부터 더러운 병들이 길바닥에 늘어서있다. 화장실이 없기에 여기저기 인분(똥)이 널려있으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이곳은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상 행동을 하면서 거리를 지나간다. 아무래도 흑인이 많다 보니,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 역시 대단하다.

텐더로잉은 길거리 홈리스, 마약중독자에게 폭행당하거나, 강도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특히 해진 뒤 텐더로잉 밤거리를 걷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여자든 남자든,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걷다가 뺏기는 일이 빈번하단다. 텐더로잉을 걷는 내내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었다. 정말 무서웠다. 길거리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텐더로인 거리에 쌓여있는 인분을 치우는 환경미화원의 모습과 홈리스들의 텐트, 짐이 보인다. [출처:NEWSIS]


할렘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에겐 텐더로인 정도는 별거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우리 부부만만 있었다면, 큰 두려움 없이 지나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보호해야 할 어린 정우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아주 작은 위험신호가 포착되더라도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위험은 늘 순식간에 온다. 그리고 위험이라는 건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느낀다. 막상 경험하기 전엔 멀게만 느껴져, 설마 그럴리가 하다가 큰 코 다친다.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고자 경험을 통해 배우기 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작은 노력을 하고 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백 번째도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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