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에 문을 연 <피터루거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는 날이다. 거금을 써야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에 세계 최고의 스테이크를 맛보는 건 여행자의 필수 덕목 중 하나라는 어쭙잖은 핑계를 대본다.
아름다운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찍은 그날의 추억.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브루클린 브리지'에 막 들어섰을 뿐인데, 벌써 사랑에 빠졌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패션으로 멋을 낸 사람들로 북적인다.
맨해튼에서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면 <Dumbo 덤보>를 마주한다. '무한도전' 촬영지이자, 여러 영화와 포스터에 등장해 눈에 익은 장소다.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보이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감상할 수 있어 멋진 사진을 원하는 이들로 늘 붐비는 곳이다.
Dumbo
고즈넉한 거리,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브루클린의 매력에 빠져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거리 위로 어스름이 깔리고, 브루클린 특유의 색감이 살아나는 시간이다. 고로, 우리의 저녁 예약시간이 다 되었다는 얘기다.
정우가 멋진 연미복 차림의 웨이터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어린아이가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제안하면 다들 좋아한다. 귀여운 아이와 손바닥 마주하는 걸 싫어하는 삼촌과 이모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zagat, 미슐랭에 늘 이름을 올리는 최정상 스테이크 하우스 <피터루거>
바삭하게 구워낸 겉면에 버터와 소기름을 계속 끼얹어낸다.
피터루거 스테이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다시 먹고 싶다는 말 밖에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하지 않다.
'美味 아름다운 맛'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고기 본연의 깊은 풍미와 넘쳐흐르는 육즙이 입 안 가득 감싸고, 완벽하게 구워낸 겉면의 바삭함은 식감까지 완벽하게 한다. 소 지방 특유의 부드러운 고소함까지 더해진 고급스럽고 근사한 맛이기에 세계 최고의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다.
"이런 곳을 한 달에 한 번은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난 정말 부자가 되고 싶어!" - 스테이크 덕후 호선생의 전언 -
환상적인 식사를 마치고, 이제 평택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느덧 밤 10시가 되어간다. 위험천만한 뉴욕에서 5살 아이와 늦은 시간까지 대중교통으로 돌아다니다니 혹자는 미친 거 아냐? 비난할 수 있지만, 일주일 간 뉴욕에 머물다 보니,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도시임을 체감했다. 그래도 서둘러야 한다. 갈 길이 멀다.
페리 타러 가는 길, 월스트리트 성난 황소상 앞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언제나 긴 줄을 서서 사진찍는 명소인데, 밤거리를 걷다보면 이런 행운을 발견한다. 뉴욕의 밤, 그 어떤 도시보다 화려하다.
친절한 뉴욕의 아가씨
서울여행 와서 평택에 묵는 여행객이 없기를 바란다. 뉴욕여행하며 발전한 게 있다면,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온갖 구실을 붙여 상황을 미화시킨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걸까?
페리항으로 가는 버스 안 45분 동안, 이제는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쳤는지 관심 없는 페리 안에서, 여정의 굵직한 결정을 했다.
페리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마천루와 자유의 여신상
오늘 아침도 뉴욕시 평택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절박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며칠간 맨해튼 가는 경로를 검색 끝에 새로운 버스노선을 찾아냈다. 호스트도 알려주지 않은 노선으로, 34번가까지 5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늘 1시간 41분 이상 걸려서 맨해튼에 겨우 도착했던 우리에게 50분은 그저 선물이다.
이제 거의 뉴요커가 된 것 같다. 어제 저녁엔 월드트레이드센터 (WTC)로 가는 방향이 맞는지 묻는 외국인 청년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봐봐!! 나는 이제 뉴요커다!!
하지만 선물 같은 버스노선은 쉽게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뉴욕 첫날 구매한 1주일 패스 메트로카드가 인식되지 않는다. 다른 카드가 필요하단다. 배차시간이 30분, 이 버스를 절대 놓쳐선 안된다.
"How much is it?" (절박한 표정으로 얼마를 내면 되는지 물었다.)
버스기사가 고개를 젓는다.
"I can not take cash. You need to have card..."
(난 현금을 받을 수 없어요, 당신은 전용 버스 카드가 필요해요.)
34번가까지 직행하는 그 버스는 광역버스 노선으로, 전용 교통카드가 필요했다.
"이정아, 일단 내리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로 버스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I can pay!!!" (내가 계산할게요!!)
내리려던 우리 뒤로 누군가 다가온다. 예쁘장한 외모의 젊은 아가씨였다.
"I can pay!"를 말하며, 카드 인식기에 두 번 터치하며 대신 계산을 해주었다.
"Oh~ Thank you so much. I can give you a cash." (오~ 정말 고마워요. 내가 현금을 줄게요.)
"No. It's ok seriously." (아니요, 진심으로 괜찮아요.)
그녀에게 Thank you so much. 를 몇 번 말했는지 모른다.
처음 보는 누군가 곤경에 쳐했을 때 선뜻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것도 단순한 도움 아닌 돈을 지불할 수 있을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편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내리는 길에 그녀에게 다가가 인스타그램 주소가 적힌 쪽지를 전달하며..
"Thank you again, without you our plan would be messed up. Please leave a message when you come to Korea, we will invite you a big dinner, seriously."
(다시 한번 고마워요,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 계획은 흐트러졌을 거예요. 당신이 한국에 오게 된다면 메시지를 꼭 남겨주세요, 당신에게 멋진 저녁식사를 대접할게요. 진심이에요.)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뉴욕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형형색색의 뉴욕 거리들과 매일밤 지나던 자유의 여신상
하루 2만보걷는 도보여행 끝에는 아빠에게 업혀가는 어린이.
영화 <세렌디피티>의 스케이트장, 그랜드센트럴터미널, 영화 <섹스앤더시티> 캐리가 결혼식을 올리던 뉴욕도서관
걷기만 해도 좋은 브라이언파크, 좋은 책들이 많은 <Barnes & Noble> 서점
뉴욕도서관의 상징 사자상과 함께, 무료전시에서 발견한 좋아하는 그림책 <에즈라 잭 키츠 - 눈오는 날>
환상적이던 배터리파크의 선셋, 뉴욕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지켜주는 센트럴파크
머무는 내내 행복했던 뉴욕 현대미술관, 정우가 잠든 틈에 한참동안 감상했던 모네의 수련화 시리즈.
뉴욕의 가을을 만끽, 매일 잠깐이라도 산책했던 센트럴파크
9.11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 미국사람들의 추모문화가 부러웠던 시간. 새로 지어진 WTC의 위용
아이와 세계여행의 시그너처 포즈
뉴욕 여정의 마지막날을 따뜻하게 시작한다. 누군가에겐 척박하게 느껴지겠지만, 우리가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다정했다. 비록 월스트리트 멋진 슈트차림의 섹시가이를 볼 수 없던 건 아쉽지만, 다양성과 자유분방함은 다른 도시에서 느끼기 힘든 뉴욕만의 정서로 느껴진다.
처음엔 제멋대로 입은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의 히스패닉과 흑인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내내 조마조마했는데, 지금은 약간의 긴장감뿐이다. 그런 버스를 거의 매일밤 10시까지 타고 다녔으니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건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부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정우가 길을 막으며 장난쳐도 따뜻하게 미소 짓던 사람들, 지하철에서 정우가 타자마자 접이식 자전거를 힘들게 옮기며 자리를 양보하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받았다. 뉴욕에서 나쁜 경험을 겪은 이도 많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느낀 뉴욕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사건사고가 많은 뉴욕이라 긴장감과 기저에 깔린 걱정이 그 어떤 도시보다 컸다. 그렇게 걱정했다면 지하철, 버스도 타지말지... 하지 말라는 건 다 했으면서 걱정은 왜 했는지 참 어리석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걱정은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늘 여정이 끝나면 아쉽다. 조금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