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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델라 May 19. 2019

선배가 먼저 내민 손의 온기는 전염된다

간호 학과 전통인 '선배-후배 매칭'을 통해 바라본 시선

    간호학과에 들어와서 가장 적응하는데 오래 걸린 것은, 선배와 후배의 매칭을 통해 학교생활 적응을 돕는 제도였다. 이전 대학에서는 1학년 때 개강파티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모여 술을 마시며 알게 되거나, 교양을 통해 학과 선배를 만나게 되는 등 선배를 차근차근 알게 되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선배는 몇 명 안 되었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아는 선배(혹은 후배)가 많아짐에 따라 지나가며 인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간호학과에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것보다 처음부터 모든 선배에게 인사를 잘하고 늘 방긋방긋 웃는 그런 ‘싹싹한’ 후배를 원했나 보다.     


    나의 성격은 그렇게 싹싹하고 방긋방긋 잘 웃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한 건물에 여러 학과가 쓰기에 간호학과 선배들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3, 4학년 수업을 하시는 교수님께서 1학년 수업시간에 들어와 “3, 4학년이 그러던데, 이번 1학년들은 인사성이 없다는 얘기가 있어요. 같은 학과끼리 서로 인사하면 좋잖아요?”라며 꾸지람 아닌 꾸지람도 종종 들었다. 그러다 선배와 함께 하는 행사를 할 때면 처음엔 냉랭하다가도, 내가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재입학했다는 것과 자신들보다 4~5살 차이 난다는 걸 알게 되면 그제야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배 행색을 내고 싶어 하는 2학년은 “나이 많아도 후배는 후배죠. 서로 존댓말 했으면 합니다.”라며 쌀쌀맞은 말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 자신들보다 고작 1~2살 어린 1학년들에게 여전히 좋지 않은 눈총과 계속된 꾸지람이 있었다.     

    그렇게 입학이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선배-후배 매칭해 주는 제도를 시작했다. 1학년 카카오 단톡 방에서는 매칭 된 선, 후배의 이름과 선배의 연락처가 올라왔고, 이어 1학년 과대표가 “선배에게 먼저 연락하는 아름다운 후배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주까지 먼저 연락드려 봅시다.”라고 말했다. 과대표가 말하는 ‘아름다운 후배’의 모습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에 빠지다가 제발 친절한 선배를 만나길 기도하며 연락을 했다. 그러고 며칠 뒤 만나보니 학과 행사에서 보았던 선배에 비해 굉장히 착한 선배랑 매칭 되었구나 싶어 안도했다.      


    그런데 다른 1학년 동기들에게 물어보니 살갑게 굴어도 쌀쌀맞게 대하거나 선배 행색을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 제도의 취지는 1학년들의 학교생활을 돕고, 교수가 미처 전달하지 못한 세밀한 부분을 알려주고 챙겨주자는 의미일 텐데 그런 취지는 싹 지워진 채 선배 대접만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인사 연습을 시켰던 만큼 인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처음 만난 날 온갖 알 수 없는 아부를 떨길 바랐다. 그 후 1학년 동기들은 평소에도 종종 커피를 사다가 나르거나 학교에서 만나면 3배 정도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네야 했다. 학생회에서는 “5층에는 간호학과 밖에 없으니까 허리를 들지 말고 ‘안녕하세요’ 말만 하고 다니면 된다.”며 교육을 시켰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 안쓰러웠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닌 강제성으로 하는 행동들을 보면서 학교와 선배들이 원하는 사회성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선배-후배 매칭제도에 대해 심한 회의감이 있던 때였다. 5월이면 3학년이 실습을 나가기 전에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있는 달이었고, 그에 맞춰 1, 2학년들은 선배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선배의 선물을 사기 위해 꽤 많은 돈을 지출해야 했음에 씁쓸함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 내냐’ 물어봤고 나보다 더 많이 지출하는 친구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나가는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 나와 매칭 된 선배가 “혹시 나이팅게일 선서식 선물비용이 조금 비싸다고 느껴?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입학하고 몇 달 안 되었지만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지 못한 선배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은 나를 용기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와 매칭 된 선배에게 솔직한 마음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원래의 가격에서 5천 원 정도 하향 조절이 되었고, 덤으로 “나도 1학년 때 왜 내야 하는지 몰랐고 너무 부담스러웠었어. 그래서 혹시나 물어봤는데 잘되었다.”, “사실 지금도 왜 이렇게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선서식이 학교 다니면서 축하할 일은 맞지만.”이라는 자기 고백과 위로도 받았다. 선물의 추세는 꽃다발과 가까운 백화점 상품권 5만 원이었지만, 비용이 줄었기에 상품권 4만 원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학교를 다니며 부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나라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대학을 한번 갔다 왔고 입학 전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했기에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직면하게 되고, 주변에서 나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거나 비슷할 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에 자괴감에 빠져있었는데 조용히 내민 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강압적이고 쌀쌀맞은 선배들 사이에 평화롭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감사함을 느끼고 안도했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선배를 보며,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신입생들에게 '내가 받은 따뜻함을 전해주어야지'라며 다짐했다. 따뜻함은 이렇게 전달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온기를 느끼게 되면 얼어붙은 마음도 녹아버린다.      


    취업 준비를 1년 간 해본 나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사회는 정말 차갑다.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로 배출될 것이기에 냉정한 사회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만큼은 인간답게 행동하고 서로를 위하는 분위기이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해,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선배의 얼굴로 마침표를 찍는다. 행복은 전염된다고 한다. 내가 느낀 사소한 행복과 온기는 나의 주변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얼어붙은 학과 분위기가 서서히 따뜻해졌으면 한다.      




* 앞으로 간호학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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