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주행 초딩일기 #9. 코 큰 눈사람
1991년 1월 3일 목요일. 눈.
< 코 큰 눈사람 >
오후. 눈이 내렸다. 비 보다 더 앞이 망망하게 내렸다. 조그만 눈뭉치를 굴리다 보니 커다란 눈덩이가 되었다. 이쪽에서 굴리다 보면 저쪽에 쌓이고, 저쪽에서 굴리다 보면 이쪽에 쌓여서, 땀이 나서 옷이 젖도록 열심히 굴렸다. 여동생은 위에 올릴 작은 눈덩이를, 나는 아래 놓을 큰 눈덩이를 만들어 갔다. 내 눈덩이와 여동생 눈덩이를 합치니 막내 동생의 키는 훨씬 넘어 있었다.
먼저 막대기를 끼우고 코를 만들었다. 눈싸움하려고 만들어 놓은 주먹 만한 눈덩이 2개를 가지고 만든 큰 코를 붙이니 코주부가 되어버렸다. 눈과 입을 붙이고, 목도리, 모자, 장갑을 끼우니 코 큰 눈사람이 되었다. 보는 사람마다 코 얘기를 하거나 코를 만져 보았다. 눈사람이 녹더라도 코만은 녹지 않았으면 좋겠다.
1991년 1월 7일 월요일. 눈.
< 가짜 꽃송이 >
꽃송이가 내렸네. 눈이 내렸네. 그런데 가짜 눈이라네. 스티로폼 같은 눈이라네.
꽃송이가 쌓였네. 눈이 쌓였네. 그래서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네. 그러나 눈은 뭉쳐지지 않았네.
뭉쳐지지 않는 눈은 가짜 눈이라네. 쌓이기만 하는 스티로폼 같은 눈은 가짜 눈이라네.
오랜만에 많은 눈이 왔지만 가짜였네. 그 예쁜 꽃송이가 나를 속였네.
약도 오르고 속도 상하지만 나는 다음에 올 꽃송이를 기다리겠네.
2024.12.9. 월요일 +덧대는 이야기
< 내일이 없는 것처럼 대처하라 >
아이들의 첫눈 대처법
초딩 홍디야. 안녕.
지난주에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할게. 첫눈으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떠들썩했단다. 더욱 들썩였던 사건은 미루어둘게. 일상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스르르 녹아 버리겠지. 부러 너의 일기장에서 눈 오는 날들을 뒤적여 찾아보았어. 그 시절 눈이 자주 온 거니, 네가 일기를 자주 쓴 거니. 눈 내린 겨울의 이야기들이 쌓여있어서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초딩 시절 꽤 너른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계절을 누리고 따먹던 추억이 사십 중반이 된 여직까지 달큼하게 남아있어. 일기 속 ‘코 큰 눈사람’과 ‘가짜 꽃송이’의 날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맘껏 뛰어놀던 감정은 눈부시게 소복하단다.
눈이 내리면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잔디를 보득보득 밟던 느낌을 기억해. 경쟁자는 고작 삼 남매 우리 셋 뿐이었지. 처마에 반짝 맺히던 고드름을 따는 것은 손이 닿지 않는 막둥이마저 열외여서 나와 여동생 단둘의 차지였잖아. 둘이서 따다 따다 다 못 따고 시들해졌던 고드름 부잣집 딸들.
지금 생각하면 온몸으로 계절을 받아들이며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은 사무치게 감사한 일이야. 우리 가족이 캠핑을 다니고,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이유이지. 너 때는 아파트 생활을 그리 동경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매끈한 눈이불을 밟으려면 부지런을 떨고 운도 좋아야 한단다.
아침 등굣길에도 일찍 나서 눈놀이하다 간신히 지각을 면했던 건만이, 건순이는 하교 후에 눈사람을 만들고, 저녁 식사를 하고서는 밤늦도록 눈밭을 굴렀단다. 삼시세끼 끼니마다 첫눈을 불태웠어. 내일이 없을 듯이 오늘에 대처하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애미는 춥다고, 고단하다고 투정했지.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자. 듣고 있니. 도대체 몇 번을 외쳤는지 몰라.
지금 돌이켜보면 눈이 시리도록 소중한 경험이었어. 실제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 꽁꽁 얼었던 손발은 녹았고 첫눈에 달궈졌던 썰매는 사진으로 남았구나.
힘껏 오늘을 미끄러졌던 아이들 덕분에 다짐한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닥쳐도 지금을 마음껏 아끼자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노는 아이들을 보며, 등교와 숙제를 걱정하는 것은 어른이더라. 자기주도학습 어렵지. 암만.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마음은 누구나 안고 있잖아. 욕심껏 애쓰지 않아도 지금에 충실하게 대처하며 오늘을 차곡차곡 쌓아보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내일이 오늘이 되는 것처럼
초딩 홍디야. 오늘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