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유부녀의 인정 욕구
어느 날 낮 12시 12분.
퇴고퇴고퇴고하던 글의 발행 버튼을 딸깍한 순간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점심 먹었어?"
"아니, 아직"
"오늘 저녁에 혹시 치킨 먹을거야?"
"오늘 저녁? 저녁 메뉴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뭐 먹고싶은 거 있어?“
"아니, 점심에 치킨 덮밥 같은 게 있길래 먹을까 하다가, 저녁메뉴가 겹치지 않나 하고 전화한거야. 흐흐"
"흐흐, 뭐야"
둘다 실실 웃었다. 영양사가 월별 식단 관리해주는 학교급식이나 메뉴가 고정이지. 털어도 털어도 더이상 냉털할 게 없는 우리집 저녁 메뉴판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이정표랍니다.
이은경선생님은 <오후의 글쓰기>에서 말씀하셨다. 설거지 정도는 미뤄두는 여유를 가지고 글쓰기를 지속하라고. 설거지는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글이 남을거라고. 배운대로 실행하는 모범생은 속 시끄러운 집안꼴은 잠시 모른 척 하고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보 땡기는 걸로 먹고, 뭐 먹었나 알려줘. 안 겹치게 저녁 준비할게. 흐흐흐흐"
"아 뭐 먹지? 흐흐흐흐"
어제 저녁 설거지도 못 쳐낸 나에게 오늘 저녁 메뉴를 묻는 신랑과 너털 웃음을 주고 받았다.
'퇴직'이란 걸 한지 1년 남짓. 퇴사가 아닌 ‘퇴직’이라는 표현에 다시는 회사에 출퇴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담뿍하다. 22년동안 좋아하는 걸 일로 하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았더랬다. 아등바등하던 워킹맘이었지만 그 만큼의 월보상도 받았었고.
그러다 금전적 보상이 없는데도 오히려 분주한 하루들이 쌓여가고 있다. 생산은 않고 소비만 하는 존재구나 싶어 영 언짢다. 가족들 외에 마주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니, 자존감, 회복탄력성, 자기애 그런 것들도 죄다 쪼그라든다.
누가 시키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데, 글이며 그림이며 왜 끼적이게 되었나. 나만의 '나'를 찾고 싶다. 인생 연장전에 멋들어진 골든골을 위하여 기본기를 다져볼란다.
치킨 이야기에 허허허 하다가 갑작스런 진지 모드는 뭔가 싶다. 신랑이 흐흐 하면서도 나를 인정해준 것 같아서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갔네. 아무튼 채워진 유부녀의 인정욕구.
나는 저녁메뉴쯤 준비해두는 아내이다
하긴 더러는 주말 식단 쫙 계획해두기도 했지. 아, 캠핑 갈 때는 메뉴를 촘촘히 구성하긴 하네.
건만이 하교 전에 40분 정도 시간이 있다. 급히 장을 보러 상가 마트라도 가 봐야겠다. 머안감(머리안감았어요)은 필수요, 내 한 몸 같은 캡모자를 눌러쓰며 신랑에게 톡을 보냈다.
그대의 점심 메뉴 최종 선택은?
나주곰탕.
그럼 저녁에 치킨 먹을까?
ㅇㅇ 먹어요.
'ㅇㅇ' 뒤에 '먹어요' 라는 세 음절을 적어 준 신랑님 감사해.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에도 소비만 하는 전직 생산자는 울고 웃어요. 괜히 그래.
메인 메뉴는 주문할 거니까 털털이 냉장고 채울거리들만 후다닥 사와야겠다. 그나저나 치킨도 평소 먹던 순살후라이드반반을 시킬지, 속초에서 못 먹은 닭강정을 시킬지 또 갈팡질팡이다.
이런 삼시세끼.
진심으로 끝없이 퇴고퇴고퇴고한다. 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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