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편지
"저게 뭐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초록 봉지로 눈길이 다가갔다. 현관 앞 비스듬히 세워진 킥보드 바퀴 옆에 살포시 놓인 봉지와 노란 메모지.
우리집에 누군가 왔다 갔다.
안녕하세요.
농막에 다녀왔습니다. 가을냉이 좀 캤습니다.
된장 살짝 풀어서 국으로 드셔보세요.
춥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15층 드림.
15층 어르신께서 다녀가셨구나.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뵙는 15층 노부부께서는 짐작건대 공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느낌이었다. 오가며 우리 아이들과 마주할 때마다 소소한 것도 관심을 가져주시곤 했다.
"유치원 다녀오는 거야? 오늘 만든 작품이구나. 정말 멋지다!"
"오빠 키가 부쩍 더 컸네. 반장 생활은 요즘 어떠니?"
그리 살갑게 대해주시니까 1분이 될랑 말랑한 엘리베이터 탑승시간 내에 아이들도 온갖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지난 여름에는 아들만 잠시 따라오라고 하시고는 귀한 포도와 가지를 나눠주셔서 맛나게 먹었었다. 이번에는 친히 집 앞에 두고 가시기까지. 가을을 선사해 주신 미리 산타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피아노 치듯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집에 들어와 15층 선생님(글씨체를 보고 확률이 더 높아졌다)의 메모를 다시 정성껏 읽어본다.
가을냉이가 있구나. 냉이는 봄에만 나는 줄 았았네. 포털에 검색해 보니 가을냉이도 맛이 좋단다. 냉이는 색깔도 향도 봄이 온 것만 같은데, 이 추운 날씨에 어찌 이리 야릿하고 파릇하게 자랐니. 가을에는 나물이 흔하지 않은데, 39주 기다리다 만난 갓난아가 머리칼 만지 듯 냉이 잎을 어루만졌다. 대견한 놈들.
자, 이웃의 정이 깃든 냉이된장국을 끓여보자. 양파, 버섯은 늘상 있는데, 예정에 없던 메뉴라 냉장고를 열고 스캔해 본다. 다행히 두부가 있네. 되었다.
디포리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는 사이, 폰을 잠시 보았다. 눈알과 엄지의 협업으로 벽타기를 해야하는 동기 단톡방이 잠시 소강 상태이다. 쓰는 엄마들 모두 복닥복닥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지. 영글작가님이 ‘배추된장국을 끓일 것인가, 국 없는 날로 갈 것인가’ 고민하신다. 오! 영글님 감사해요. 덕분에 배추 추가합니다요.
오프라인 X 온라인 이웃님들 도움 콜라보로 먹게 된 저녁 메뉴 '가을냉이배추된장국'을 온 가족 맛깔나게 싹 비웠다. 애비는 냉이를 리필하고, 건만이는 배추 줄거리에 '음~'을 연발하고, 건순이는 두부를 젤리 먹듯 했다. 내 새끼들 라면국만 좋아하는 건 아니구나. 건강한 음식도 잘 먹어주니 요리사 부심이 뿜뿜한다.
가지런히 세로 쓰기로 고이 눌러써주신 글씨, 눈송이가 내려오는 듯한 마침표, 주어도 없이 단문으로 툭툭 던지시다가 마지막에 짠~ 주인공을 밝혀주시는 센스까지.
저 편지 받은 여자예요. 이런 이웃 어떤가요.
+덧마디.
이 글을 발행하고 아이를 데리러 내려간 주차장에서 15층 어르신과 딱 마주쳤다.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글밍아웃할 뻔. 입이 씰룩+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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