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은 May 26. 2021

부부의 날이 지나가버렸네?

20대의 5월과 40대의 5월


가정의 달 5월,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진 21일, 그러니까 5월 21일 부부의 날이 알지도 못한 사이 지나가버렸다. 어쩐지 SNS에 옛날 사진 좀 올라온다 했더니만 타이밍을 놓친 탓에 10년 묵은 결혼사진이나 신혼여행 사진을 풀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다. 인생에서 비현실적으로 예쁜 시기였는데.



 내 생일을 물론 잘 알고 있겠지만 한 번씩 23일과 21일 사이에서 대혼란에 빠지곤 하는 남편에게 일말의 기대도 없이 물었다. 자기, 어제가 무슨 날이 었는지 알아? 남편은 조금 뜨끔한 얼굴을 하더니 '나도 좀 전에 달력보다 알았어. 부부의 날이더라!'하고 말했다. 작년 부부의 날에 혹은 작년 부부의 날에 뭘 했는지, 지어 우리가 그런 것을 챙겨 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소속감을 가진 어떤 집단에서 우리만 중대한 것을 빼먹고 넘어간듯한 소외감이 들던 차였다. 내 감정을 읽은 것처럼 남편은 이어 말했다. 우리 분발하자!라고. 분발이라니 이것이 과연 사람 간의 관계에 어울리는 말이긴 한가 잠시 생각하다가 무렴 어때 싶어서 나도 같이 각오를 다졌다. 그래 우리 분발하자!




그날 밤, 분발하기로 한 우리는 바로 실천에 나섰다.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새벽까지 야식을 먹고, 먼지 쌓여가던 플스를 하고, 티브이를 보며 낄낄 웃어댔다.

자기야 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왜 이렇게 좋지?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킬 때쯤,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내가 되어 가장 좋아하는 남자와 20대처럼 철없이 놀다가 물었다. 마흔인 남편은 그에 대해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평소와 다른 그의 몸이 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게임기를 뿅뿅거리는 어깨가 마치 어깨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겜돌이 남편은 임신을 하면 육아에 전념해야 한다며 게임기를 팔았다가 아이가 손이 덜 가는 4세쯤 되면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둘째가 네 살이 되면서 다시 플레이스테이션을 사들 남편을 향해 '육십이 돼도 이거 하고 있으려나, 그럼 좀 귀엽겠네.' 은 생각을 하던 밤, 긴밀한 유대감과 삶의 잔재미가 쌓여 사는 일이 오랜만에 막 재밌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월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났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다가오는 금요일 밤엔 뭘 하고 놀까 궁리하던 우리에게 뒤통수를 치며 선선히 다녀간 세월에 남편도 나도 당황하고 말았다.

갑상선 항진증을 앓고 있던 남편이 이번엔 당뇨 위험군이라는 통보를 받고 식단은 물론 꾸준한 운동과 관리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끊은 담배는 그렇다 치고 이제는 술도 야식도 꿈도 못 꾸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하 온몸이 찌릿찌릿하게 입안을 감쌌던 불막창이여 안녕. 로록 넘기며 먹었던 새벽의 컵라면 들도 이젠 안녕인가. 남편은 겨우 마흔인데 이미 있는 병도 모자라 또 다른 녀석 으로 걸어 들어와 갑갑해져 버렸다. 거기에 그간의 즐거웠던 일들까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심심한 음식처럼 일순간에 인생이 싱거워지고 마는 느낌이었다.



재미는 20대나 찾는 거였나. 식단 조절을 위해 채소반찬을 늘린 식단으로 저녁을 준비하며 사는 재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재미는커녕 책임만 늘어가는 40대가 코앞이었다. 남편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어 두세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 정수기 옆엔 각종 영양제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편은 아예 책상 위에 플라스틱 통을 갖다 놓고 늘어난 약과 건강식품을 종류별로 수납해 야무지게 챙겨 먹고 있었다. 겨우 마흔 언저리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런 상황에선 낙관만이 살길이다.






어느 광고에서 본 '유병장수의 시대'라는 문구를 종종 떠올린다. 아예 모르고 살다가 무섭게 당하는 것보다는 내 몸에 대해 알고 대비하는 편이 더 희망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까짓 새벽까지 맥주에 야식 좀 먹지 못해도 결혼한 부부에게 으른의 놀이는 따로 있으니까 괜찮다. 세월에 흔들리고 쓸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산책 같은 심심한 것들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서 더 많은 시간이 지나서 몸뚱이는 말을 안 듣고 오직 입만 자유로운 시기가 와도 티키타카가 잘 되는 부부니까 괜찮겠지 뭐, 하고 낙관해본다. (여기까진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다. 아 늙기 싫어.) 



에쿠니 가오리가 그랬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밌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고. 저 문장을 읽었던 20대엔 까맣게 모르고 있었. 재밌고 즐거운 날들이 조금 슬프게 지나가는 오늘을 말이다. 하긴 그땐 5월 이쯤이 성년의 날이었지, 부부의 날은 무슨!



작가의 이전글 남편이 측은해 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