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측은해 질 때
꼭 설레야 좋은 건 아니니까
그날 보쌈집 앞에서 우린 진짜 격렬하게 싸웠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밥 위에 올려주는 생선살만 먹고 자라온 내 눈엔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서 야금야금 먹는 남편의 행동이 너무 이기적이게 비춰졌기때문이었다. 거기까지만 했어도 좋을 텐데 그는 내가 슬슬 부아가 치미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어? 니 이거 안 먹네? 그럼 내 묵는다~'하며 내 몫의 남은 생선 한 마리도 혼자서 야무지게 먹어버렸다. 그때 나는 와, 뭐 이렇게 이기적인 남자가 다 있지? 싶었고 남편은 먹고 싶으면 네가 먹으면 되지, 게다가 이건 메인도 아닌 사이드 메뉴일 뿐인데! 그게 화낼 일이냐, 란 입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땐 왜 치열하게 싸웠나 싶어 얼굴이 뜨거워진다. 20대 초반이니까 가능했던 일이겠지 싶지만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 그를 알아가기 바빴고, 알아가는 동시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를 평가하게 되었다. 평가라는 말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의도하지 않더라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결혼이 아닌 '연애'였기 때문에 연애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생선살을 밥 위에 올려주기는 커녕 혼자 다 먹어치울 때 그에 대한 내 마음은 순간 바닥을 쳤고, 늦은 시간에 나를 만나러 오거나 생각도 못한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을 때 그는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남자가 되었다. 그의 성실함에 반하고, 그의 슈트핏에 설랬던 순간들 이면에 나를 향한 그의 행동에 알게 모르게 그를 향한 마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결혼까지 이르게 됐다. 스스로도 그걸 계산이라 의식하지 못했지만. 남편 역시 내가 결혼해도 좋을 여자인지 아닌지 고민하다가 함께 살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연애가 설렘 뒤에 알게 모르게 이뤄지는 서로에 대한 관찰과 평가로 이루어져 있다면 결혼은 설렘이란 단어와 아무래도 동떨어져 있다.
설레고 싶지 않냐?
회사의 유부남 삼인방은 막 결혼한 풋풋한 내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 뒤 동조를 바랐었다. 연애하고 싶다는 망언도 종종 했다. 지금의 삶이 나쁜 건 아니지만 연애의 설렘을 느끼고 싶다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단체로 미쳤구만'싶었다. 그게 십 년 전.
오 년 전쯤엔 나를 포함해 결혼한 친구 셋이 앉아 미혼인 친구를 향해 '와! 니가 제일 부럽다. 너는 김수현도 박보검도 만날 수 있잖아.'라고 말하며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좋겠다고 떠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가 '연애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아~ 왜 이래 진짜!' 했지만 친구도 나도 그날 눈물 나게 웃었다.
결혼 10년 차, 이제는 저 말의 의미를 알게 되다 못해 이해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오래전 속으로 욕해대던 유부남 삼인방을 찾아가 심심한 사과의 말이라도 전하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는 말은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럴 수도 그럴 리도 없지만 그 시절의 내가 그립고, 그 시절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이 되어서야 추억하는 말 일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매일매일 설레는 부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있다 해도 지금의 설렘이 처음 만나 느끼던 그 설렘과 같은 농도 일리 없다. 첫 만남의 그 시절, 찌릿찌릿하고 미성숙해서 귀엽고 천진했던 그때의 우리가 나도 가끔 보고 싶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젊음'과 '연애'처럼 내 삶에 다시없을 시기를 정의하는 단어가 그리울 뿐이지 남편과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지금이 훨씬 더 단단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 대한 평가는 곧 나에 대한 평가이기에 우리 사이엔 상대를 향한 걱정과 배려 응원과 협동 같은 단어들만 존재한다. 나와 완전히 다르지만 같은 것을 꿈꾸고 같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같은 미래를 계획하는, 게다가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줄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정말 든든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안정이다.
얼마 전, 거제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남편과 멜론으로 음악을 들으며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긴 시간의 무료함을 달랬다.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신나게 재생하고 있을 때 남편이 나훈아의 노래를 듣자고 했다. 나훈아? 자기 멀리 가네, 멜론 많이 들은 곡 순위를 BTS의 노래로 채우고 있는 내게 나훈아는 좀 어색했지만 함께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한마음으로 불러보았다. 남편의 다음 신청곡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다. 아직 테스 형을 부를 때 올라간 텐션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담담하게 여보를 부르는 그 노래에 명치를 훅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그 가사가 나올 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남편에게 말했다. 아, 60이 무슨 노부부야! 이 노래 너무 슬프다. 자기 나보다 일찍 죽지 마! 이틀이라도 더 살아야 해. 꼭! 마흔이 되어도 장난꾸러기에 놀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남편이 이때만큼은 응 그럼, 이라고 대답해줬다.
웃으며 결혼했던 그날이 있었듯 내 인생에서 울면서 남편과 헤어질 날 또한 있다는 것은 너무 두렵고 슬픈 일이다. 언젠가 대학병원 진료실 앞에서 췌장암이란 말을 듣고 통곡을 하던 60대쯤으로 보이던 아주머니가 한 번씩 생각난다. 진료실을 뛰쳐나와 서럽게 울던 아주머니 뒤로 70대로 보이던 남편과 아들이 따라 나왔다. 안돼, 하며 흐느끼던 아주머니의 등을 가만히 가만히 쓸어주던 남편을 보며 저분 정말 좋은 남편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플 때조차 아내를 향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남자라니. 아주머니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서럽게 우셨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해 줄 때면 남편은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듣는다. 좀 더 감성적이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나는 심하게 몰입해 남편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가 진짜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설렘, 그런 감정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내 앞에서 날아올라(?) 격파 시범을 보여줬던 남편이 툭하면 누워서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즘은 안타깝고 측은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남편이 측은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진짜 사랑이라던데, 아무래도 이렇게 로미오와 줄리엣 부럽지 않은, 견우직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찐 사랑이 시작되는가 보다. 뭐, 꼭 설레야 좋은 건 아니고 풋풋해야 예쁜 건 아니니까, 서로를 어여삐 여기는 10년의 참사랑도 좋다. 측은하다는 그 슬픈 말이 곧 내 맘이지만, 이런 으른의 사랑. 포에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