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에 발이 달려서 그래
자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작년 겨울,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아이 반에 소지품을 챙기러 갔던 날이었다. 아이가 앉았던 조그마한 책상에 코끝이 찡해지는 것도 잠시 아, 정말 너는..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아이의 서랍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교과서들 사이사이로 구겨진 프린트물과 찌그러진 색종이들이 우수수 딸려 나왔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사물함을 열었을 때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절서정연과는 거리가 먼,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학용품들이 용케 쏟아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건들을 담고 있을 때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친구관계도 좋고 성격도 좋고 뭐하나 못하는 게 없는데 딱하나 정리를 못해요~' 미소를 머금은 선생님께 웃으며 동조했지만 그때 선생님은 보고 말았겠지. 되는대로 쓸어 담은 내 큰 가방 속을 말이다. 나는 더 빨리 사물함에 물건들을 혼돈의 가방으로 털어 넣은 뒤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교실을 떠났다. 봐서 아셨겠지만 차마 '제 딸이 절 닮아서 그래요 호호'라는 말까진 나오지 않았으므로.
청결과 정리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종종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 '집이 어쩜 이렇게 깨끗해!' 모델하우스 같아'라는 말을 듣는데 실상 서랍 속을 열어보면 누가 헤집어놓은 것 같은 상태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나는 정리를 못한다. 내 서랍 속은 사실 딸아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물건들의 제자리는 한 곳이 아닐 때가 많다. 여기 아니면 저기, 그것도 아니면 저쪽엔 확실히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물건을 자주 찾게 된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안경 어딨지? 핸드폰 못 봤어? 책 어디 있더라? 같은 말을 한다. 결국 못 찾는 일은 거의 없는데 어쩌다 보니 블루투스 이어폰 한쪽의 행방을 영영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블루투스 이어폰은 남편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1+1으로 샀다는 이어폰. 그것도 너무 잘 쓰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난 뒤 더 좋은 제품이 나왔다며 또다시 업데이트된 제품을 안겨주었다. 남편과 내 블루투스 이어폰은 케어스부터 색까지 똑같았지만 절대 섞이지 않았다. 남편의 이어폰은 본드로 붙여놓은 듯 언제나 한자리에 존재했고 내 이어폰은 자유분방한 상태로 싱크대위, 화장대위, 책상 위를 자유롭게 여행했다. 그러다 한쪽이 영영 먼 여행을 떠나고 말았지만.
솔직히 나는 한쪽 이어폰으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나를 대신해 며칠 동안 한쪽 이어폰을 열심히 찾았다. 침대 매트리스 주위를 살피고 서랍을 열어보고, 엄마 이어폰을 찾은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아이들을 선동해 집안을 뒤집었다. 그러나 이어폰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이 이어폰의 행방을 찾을수록 어쩐지 나는 좀 미안해졌다. 아무래도 이어폰에 발이 달린 게 틀림없는데, 저렇게까지 찾을 일인가(!)
며칠 뒤 퇴근한 남편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안에는 새 이어폰이 들어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다 거기서 거기지 싶었던 생각과 다르게 그것은 로즈골드의 빛나는 자태를 뽐냈다. 우리가 써왔던 중저가의 이어폰과 다르게 조금 고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때로 연결이 지연되던 그 전의 제품과 다르게 어찌나 예민한지 건드리기만 해도 자동으로 연결이 됐다.
'난 한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기가 써!'
서로 필요 없다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결국 그 이어폰은 내 것이 되었다. '비싼 거니까 소중하게 쓰겠지'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덧붙인 그의 한마디와 함께.
이 남자는 내가 물건을 대하는 방식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비싸다고 아꼈다면 적어도 노트북이나 자동차가 그 모양(?)은 아닐 텐데.
아이들이 잠든 밤, 이어폰을 끼면서 비싼 거니까 아끼겠지 생각했던 남편을 종종 떠올린다. 그 마음이 고맙고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남편의 짐작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무리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사줘도 금방 시들해지고 마는 딸처럼 나의 이어폰은 생활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이 전 이어폰의 행적을 따르며 돌아다닌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어폰이 사라졌을 때 내 행동과 마음이다. 이어폰 못 봤어?라고 크게 말하는 대신 속으로 깜짝 놀라게 된다. 헉 여기 있어야 될 이어폰이 또 어디 갔지? 녀석을 찾았을 때 안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절대 이어폰이 비싸고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남편의 말 때문에 아무래도 이번만은 이어폰이 삭아 없어질 때까지 쓰게 될 것 같다.
하, 곰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이런 여우 같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