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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Aug 15. 2021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강희선 선생님이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6학년 1반의 씩씩한 강희선 선생님은 보기 드물게 열린 교육을 실천했던 참 교육자셨다. 물론 나는 소심한 성격인데다 그쯤 사춘기를 직격탄으로 맞은 탓에 그다지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학생 모두에게 한결같은 지지와 신뢰를 보내주던 선생님과의 추억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책상 위에 아이들의 일기를 수북하게 쌓아놓곤 대단한 연구에 빠진 과학자처럼 일기 더미에 빠져 빨간펜을 열심히 굴리셨다. 어떤 날은 글자 밑에 잔잔한 물결이, 어떤 날은 호된 야단이, 어떤 날은 옆장 가득 칭찬을 써주며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고 낱낱이 들여다보는 탓에 우리는 아무리 어른인 척해보려 애써도 선생님에게 번번이 속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그 시절 가장 숨기고 싶었던 비밀은 내가 좋아하는 이성친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걸 좀처럼 숨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달에 한번 짝을 바꾸는 날을 잊을 수 없다. 먼저 손을 든 친구가 이성친구의 이름을 호명하며 그 친구와 몇 분단 몇째 줄에 앉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뒤 둘이 그 자리에 가서 앉는 아주 신박한 방법으로 아이들은 짝이 되었다.(선생님은 천재였나!) 조용한 가운데 부산스러운 눈치게임이 시작되면 용기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고 원하는 친구와 자리로 떠났고, 그렇게 골고루 아이들이 섞였다.


어릴 땐 반장도 부반장도 하곤 했는데 어쩐지 열세 살이 되자 점점 더 소심한 성격이 또렷해지던 나는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발표도 싫어 죽겠는데 좋아하는 친구의 이름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해야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범위도 너무 좁았다. 겨우 6학년 1반에서 짝을 찾으라고? 나의 그릇은 그렇게 작지 않아! 나의 이상형은 6학년 5반에 있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시시하기 짝이 없어 좀처럼 손을 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대부분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 친구와 짝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영화나 드라마 회상씬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치그 장면! 그러니까 새침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째려보면서 연필로 책상이 파이도록 줄을 긋고는 '너 여기 넘어오기만 해 봐!' 으름장을 놓던 여자아이가 바로 나였다. 지우개라도 넘어오는 날엔 팔꿈치 공격을 해가며 투닥거렸다. 그래 놓고도 다음 달에 줄을 긋지 않을 만한 친구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꼭 나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서 싫지 않은 친구와 짝이되기도 했다. 이전까지 별 관심이 없던 친구였지만 짝이 되고 보니 정말 다정한 성격이었고 달리기도 태권도도 잘하는 그 아이가 나는 금세 좋아졌다. 팔꿈치 공격 한번 없이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렸다. 다시 짝을 바꾸던 날, 선생님은 좋아하는 이성친구에게 편지 쓰는 시간을 주셨다. 한 달 내내 짝을 하고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그 친구의 이름이 당연히 떠올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게도 나는 만만한(?) 다른 남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쓰기가 끝난 후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나눠주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짝꿍이었던 재영이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 아이는 편지에서 나와 함께 짝을 했던 한 달이 정말 좋았다고 썼다. 누가 또 아니? 나중에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내가 널 찾을지!라는 귀여운 말까지 덧붙여놓았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던 그 아이가 정말 티븨에 나오지 않을까 나는 우연히 TV는 사랑을 싣고를 볼 때마다 그 아이를 떠올리곤 했다. 당시 내 마음도 비슷했지만 엉뚱한 친구에게 편지를 쓴 탓에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겨우 열세 살밖에 안됐던 나는 왜 재영이처럼 솔직하지 못했을까! 재영이의 편지를 받고서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애한테 갑자기 너무 미안해지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감정을 숨겼던 나는 그 일을 계기로 달라졌다.



사춘기 본격 연애장려 프로그램 같던 6학년 1반의 짝 바꾸기는 사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교육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감정의 솔직함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면 연애시절 고백도 못하고 끙끙대던 남편을 향해 '오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나 좋아해요?' 같은 말을 절대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을 하던 날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나는 대책 없이 웃어대는 신부였다. 사람들은 이런 날 보고 '딸 낳겠다!' '그렇게 좋으냐' '부모님 서운하겠다' 그랬지만, 아니 웃긴 걸 어떡하라고. 누구랑 몇 분단 몇째 줄에 앉는다는 말도 못 해서 분단선에 버금가는 줄을 그어놓고 싸우던 내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라고 고백하는 게 재밌었다. 열세 살 재영이에게는 그러지 못했지만 남편에게는 감정에 솔직했던 탓에 결혼을 하고 10년의 결혼생활도 잘 해내고 있다. 선을 긋지 않고 팔꿈치 공격을 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것에 감사하며, 수학도 국어도 잘 가르쳐 주셨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알려주신 강희선 선생님을 종종 떠올린다.



여전히 당당한 걸음걸이로 아이들을 향해 용기를 내라고 독려해주시는지,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선생님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을 얻어갔는지 궁금하다. 한 사람이 남긴 관심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도 얼마나 선명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고등학교 때 담임도 가물가물한 내가 열세 살, 선생님과 보냈던 겨우 1년의 시간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맞는가 보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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