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라니, 그것도 위로라고 건넸다
인생은 고통과 행복사이, 슬픔과 감사 사이에 있었다.
평화롭고 더없이 일상적인 어느 날 형님의 전화가 평온을 와장창 깨부쉈다.
"동서 큰일 났다. 아버님 암이란다."
전화기를 뚫고 경상도에서 날아들어온 형님의 그 말이 너무 현실감 없어서 똑똑히 들었는데도 횡설수설 되묻고 말았다.
"네? 아버님이? 응?"
"암이라고. 아버님 간암이란다."
확실한 거냐고 묻자 형님은 CT를 찍었는데 의사가 암인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지금 당장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예약해 보자고 했다. 전해 듣는 입장이라 아버님이 확실하게 암진단을 받으신 건지, 그렇다면 몇 기인지, 아니면 의심 단계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내가 더 알 수 없었던 건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려야 하는지 마는지였다. 남편은 유럽 출장 중이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을 오가는 긴 일정에 지쳐있을 게 분명했다. 몸이 유럽에 있으니 사실을 전해도 마음만 불편할 게 뻔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소식을 남편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버님이 느끼고 계실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남편의 전화로 조금은 희석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이 됐다. 어른이 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어떤 일에서는 답을 몰라 헤매는 나를 본다. 남편의 마음은 뭘까, 내가 알려주기를 바랄까 마음만 불편한데 차라리 모르고 지내다 알게 되는 게 좋을까. 남편이 덜 다치기를 바랐기 때문에 판단이 더 어려웠다.
대학병원 몇 곳에 예약전화를 넣고 나서 고민 끝에 남편에게 입을 뗐다. 형님이 분명 큰일 났다. 아버님 암이란다,라고 말문을 열었지만 나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지우고 최소한의 불행을 남편에게 전했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남편의 마음이 어떤지 전화 목소리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은 했지만 마음이 어디 그럴까.
온 가족이 노력한 덕분인지 병원예약 날짜는 빠르게 잡혔다. 남편과 아주버님이 아버님과 동행해 병원에 방문했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은 가차 없이 버려졌고, 아버님은 간암진단을 받으셨다. 아버님은 간경화로 3개월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추적검사를 받고 계셨는데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질병인지 알고 있었지만 병명이 암으로 뒤바뀌자 곧바로 암담해졌다.
햇살이 아무 때곤 등뒤로 꽂히던 8월의 여름이었다. 그 여름 오래 계획했던 여름여행을 취소했고, 남편은 그 휴가를 반차로 쪼개가며 늘 아버님의 병원에 동행했다. 유난히 덥고 길었던 여름이었다.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여름의 맛을 마음껏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루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의 여름이 괴롭고 고됐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름, 내가 남편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다행이다'였다. 아버님은 지속적인 검진 덕분에 수술이나 항암 없이 시술로 치료가 가능했다. 1박 2일 입원 후 바로 퇴원이 가능했고, 고통도 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다행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지난 시간을 더듬어보면 다행이라는 나의 안도 뒤에는 남편의 걱정이 따라왔다. '이미 간경화가 많이 진행돼서 다른 혹들이 언제 또 암세포로 바뀔지 몰라' '아버지 나이도 있는데' 같은 말들.
남편의 걱정은 곧 사실이 되었다. 시술이 잘 되었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른 위치에 암세포가 또 발견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내가 뭐라고 했던가! 너무 작아 암세포인지 확실하지 않고, 염증일 수도 있다는 말에, 혹시 암이더라도 이번에도 시술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또 다행을 연발했다.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이 계절에 와서야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여름 남편에게 다행인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의지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암진단을 받았고, 남편의 말대로 이제 시간을 두고 시술과 수술을 반복할 일만 남았을지도 몰랐다. 늦은 여름 아버님을 뵈러 갔을 때, 너무 수척한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때는 거인 같았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내가 직접 병원에 가고 모든 상황을 접하지 않았기에 느낄 수 없었던 비통함과 착잡함을 간과한 채 나는 다행이라는 말만 연발했던 것이다.
암으로 보였던 작은 세포는 암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시술을 받으려고 꼼짝없이 3시간가량을 누워계셨는데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아 시술 없이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번만큼은 다행이라는 말대신 화가 났다. 오진이 분명하지 않냐고, 아버님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은 누가 책임지냐고 묻게 됐다.
남편은 그렇지 하면서도, 어머님과 아버님이 아니면 됐다고 이 상황이 얼마나 감사하냐고 하셨다는 말을 전했다. 이 사이에서 두 분이 느꼈을 두려움과 걱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살면서 여지없이 만나게 되는 시련 앞에서 함부로 전하는 '다행'이라는 위로가 가볍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니, 고통의 시간을 겪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겪은 시련들 또한 경계가 분명했다. 인생은 불행과 행복사이, 슬픔과 감사 사이에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으며, 아버님과 어머님을 떠올린다. 두분 덕분에 감사한 오늘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