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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Dec 12. 2023

생일엔 남쪽에 있는 '생일도'로 떠나자!

책,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를 읽고


밀리의 서재에서 책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를 읽다가 첫 꼭지에 나온 문장, 누구한테도 보이면 안 되는 마음처럼 하지만 늘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어. 라는 고백에 반해 바로 책을 주문했다.



종이책을 곁에 두고 수고한 나에게 주는 매일의 선물처럼 하루 끝에 조금씩 나눠 읽었다. 잊을만하면 마음을 긋고 가는 문장들을 만나는 책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진지하지만 재밌고 웃기지만 여운이 남는 에세이였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나만의 퇴깃 리스트’였다. 작가는 소원하던 퇴사 후에 오래 그렸던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어느 날 지도에서 발견한 신지도, 그 옆의 생일도, 그리고 근처의 평일도였다. 대한민국 남쪽 끝에 자신의 이름을 가진 섬이 있다는 걸 발견한 김신지 작가는 그 옆에 섬들도 같이 돌아볼 일정을 짜서 평일인 생일에 꼭 신지도에 가겠다는 ‘신지 생일 평일프로젝트’를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신지도에 가서 김신지 작가가 신나하는 모습을 보며, 생일도에 가서 생일을 알차게 보내는 모습을 읽으며 나는 덩달아 행복해졌다. 내 이름이 신지가 아니었던 탓에 세 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생일도였다. 우리나라에 생일을 콘셉트로 하는 섬, 생일도가 있다니! 배에서는 무려 생일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광판에 띄워주고, 생일자에겐 뱃삯도 받지 않는다고.


이쯤 읽었을 때 내 마음은 이미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 생일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 갈까? 언제 가지? 내 생일은 너무 춥고, 남편의 생일은 여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딸의 생일인 4월 12일부터 하지에 태어난 아들의 생일인 6월 21일까지의 날씨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망설일 게 뭐 있나! 나는 혼자서 딸의 생일에, 그날이 정말 여의찮다면 아들에 생일에 생일도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며칠 후 남편에게 신비하고 놀라운 생일도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에 그런 섬이 있는지도 몰랐던 남편의 반응 또한 나와 같았으나 ‘그러니까 우리 딸 생일에 생일도에 가는 거야!’라고 대단한 계획을 공표했을 땐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래, 나도 알지. 수 없이 떠났던 국내 여행에서 거친 작은 섬의 분위기를. 화려하고 대단하지 않겠지, 실제로 보면 작고 소박한 식당, 깔끔하지 않은 숙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오가는 사람은 섬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 뿐일지도. 섬의 정체성을 자랑하는 생일케이크 앞에서 사진을 찍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오래되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 모든 것이 시대를 벗어난 듯 낡아 한참을 달려 완도에 도착하고, 이름값 하나를 위해 생일도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일이 과연 합리적인가를 고민하는 남편의 마음을 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내겐 우연히 알게 된 한 가수의 굳이데이가 꽤 강렬하게 남았다. 아주 귀찮겠지만 기억에 남을 일을 굳이 하는 굳이데이. 합리와 편의보다 낭만을 앞에 두고 굳이 하는 일들을 나도 해보고 싶어졌다.



남편은 잊은걸까? 우리가 썸타던 그 시절에 첫데이트라고 부를만한 장소가 춘천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벽같이 청량리역에서 만나 춘천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버스로 갈아타 춘천시내를 구경했고, 유람선을 타고 어느섬에도 들어가 폭포도 구경하고 파전으로 점심도 먹었다. 다시 섬에서 나와 닭갈비를 먹고 청량리역으로 돌아왔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남편은 청량리역 근처의 꽃집에서 노란장미 세송이를 사서(심지어 이때 꽃값이 비싸다며 나를 멀찍이 세워두고 가격 흥정을 시도했다 와..) 왕자님처럼 한쪽 무릎은 땅에 나머지 무릎은 세운채 내게 고백해왔다.(그래 잊고 싶긴 하겠다) 굳이 춘천까지가서 데이트를 하고 굳이 춘천에서 닭갈비를 먹고왔던 그날들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이제 테이블 간격이 좁은 식당을 가는 일조차 꺼리는 우리가, 깔끔하고 잘 닦여진 것들 안에서 존재하고만 싶어 하는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생일도에 가야했다.


P는 결국 J의 계획을 말릴 수 없을 것이다. 분명 불편한 데다 싱겁고 말 4월 ‘생일도’ 여행을 지금부터 촘촘하게 그려본다. 언제더라, 하루 종일 요란한 축하를 받게 해주고 싶어 패밀리레스토랑에 아이를 앉혀놓고 탬버린을 흔들어가며 생을 축하해 준 적도 있었지만 4월엔 오래된 상에 하얀 비닐을 깔아줄 것이 분명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지, 세월을 입었을 것이 분명한 생일도 가는 배에 고민을 거듭해서 완성한 축하 메시지를 띄워줘야지. 생각한다. 세련되지도 화려하지도 않겠지만 그날 생일도에서 만나게 될 모든 풍경이 딸에게 잊지 못할, 게다가 낭만적인 열두 번째 생일을 선물할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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