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그러니까'라는 접속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이 시간에 일하기 싫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지금은 오전 9시 24분이다.)
출판업계 2년차. 단행본 편집자로는 6개월.
다른 자잘한 경력까지 생각해보자면, 짧지는 않은(그러나 길지도 않은) 사회경력…
그걸 생각해 보았을 때 6개월이라는 시간은 이미 이 회사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분석하고 논문 한 편 다 쓸 시간이다. 아닌가, 논문은 좀 그러니까 보고서 정도로만 하겠다. 논문 쓰시는 척척석사, 척척박사님들의 노고를 폄하할 순 없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지금 회사에 대한 평가 한 줄은 남길 수 있다.
"여긴 아니야……."
휴게실 캡슐커피를 내리면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입사한 지 이틀 만에 대리를 달았다. 네? 저는 신입인데요? 1년 반 경력을 쳐준다고요? 예?
이 책은 트렌디하니까 대박을 칠 거란다. 음… 작가가 원고를 재탕했다. 당연히 망했다.
대표님이 생각보다 (많이) 감성적이다. 내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조카와 상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조카도 이 정도는 아니다.)
곶감 빼먹듯 있던 원고로 책을 내다보니 원고가 다 떨어졌다. 원고가 없다는 이유로 저자를 닦달했다. 그렇게 저자는 떠나갔다.
직원이 하나둘 떠나고 현재 이 시각, 아무도 없다. 회사에는 나만 있다. 대표님과 함께 나, 셋이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부부가 공동대표라는 것이다.)
마른 걸레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고, 열심히 좋은 점을 쥐어짜면 있긴 하다.
일단 아침시간이 매우 평안하다. 대표님들은 늦게 출근하신다. 9시에 간당간당하게 출근해서 여유롭게 수혈팩(a.k.a 커피)을 사가도 아무도 없다. 베스트셀러와 신간을 둘러보고 뉴스레터까지 읽으면서 오전을 한가하게 보내도 나를 채찍질하는 사람이 없다. 이 시대의 진정한 월급루팡이 뭔지 보여줄 수 있다.
원고가 없으니까 기획에 발을 들일 수 있다. 이 짬으로는 어디가서든 내가 책을 기획하고 이것이 출간 단계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드물다. 그러니 일단 기획을 해볼 수 있는 경험이 생긴다. 물론! 내 기획이 무조건 책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원고가 없어도 대표님 취향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나와 대표님은 취향이 무척 맞지 않다. 아니, 애초에 대표님 취향이 요즘 책 시장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대표님, 이 책을 해야한다니까요? 속으로만 광광 외쳐대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점심식사 값이 줄었다. 직원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식사와 커피를 챙겨주신다. 당연히 대표님(들)과의 식사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식사를 할 때 헛소리를 하진 않으신다. 어찌되었든 대표님도 입은 하나지 않은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참고 견딘다면 버틸 수는 있을 것 같다. 누가 그랬지 않았던가. 사회생활이란 하루를 버티는 것이라고. 하루를 버텨내면 일주일을 견뎌낼 것이고, 일주일을 버티면 한 달을 버틸 것이며, 한 달을 버티면 그게 반년, 1년이 된다고……. 그 전에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버티고 본다. 사실 더한 것도 버텨봤다. 그러니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편집자다.
책을 짓는 일은 결국 버티는 일이라 생각한다. 원고를 받기까지의 인내, 책으로 완성까지의 인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지의 인내. 묵묵히 그 자리에서 수행하고 견뎌낸다면, 언젠가 빛을 발하지 않을까. 그게 메타버스와 AI가 도래한 이 시대에 여전히 빨간 펜으로 종이 교정을 보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 글을 대표님이 보시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