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얀 Oct 14. 2024

“책은 단순한 사물 그 이상이다.”

최근에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하는 <슈타이들 북 컬처> 전시를 보고 왔다.

내게 ‘슈타이들’ 넉 자는 생소할뿐더러 그의 존재를 모르고, 그 회사에서 나온 책 중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그도 그렇듯이, 슈타이들은 독일회사다― 딱히 흥미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책을 내는 회사였다.


전시는 그럴 듯하다. 사실 그라운드시소에서 기획하는 전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관계자님들 눈 감아)

기획력은 구미가 당기며 포장지가 화려하지만 정작 포장지를 뜯어봤을 땐 실속 없는 전시를 기획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카메라로 찍기 좋은 전시품 위주라서 알맹이가 영 맥아리가 없다. 소설로 치면 양산형 웹소설……. 18,000원으로 보기엔 아깝고 얼리버드로 구매했을 때는 그나마 수지타산에 맞는 전시.

이때까지 본 전시 중에 만족스러웠던 전시는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정도였을까나.

물론 여기까지는 개인적인 취향이다.


전시의 전반적인 흐름은 출판업계 찍먹을 해본 사람이라면 대충 알 만한 곳이다. CMYK부터 시작해서 교정, 인쇄, 제본까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개러몬드(가라몬드) 서체. 국전 사이즈. 면지. 뭐, 대충 그럴 듯한 거. 종이를 만져보면서 아, 얘네들은 우리나라 미모(미색모조)나 백모(백색모조) 보다는 두꺼운 종이를 쓰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말이다. 

꼴에 책 좀 만들어봤다고 하리꼬미에 대해서 침 튀겨가며 설명해주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대충 얼버무린다. 인쇄 교정을 보면서 시니컬한 미소를 입에 달고 늘 하는 말을 중얼거린다. AI와 멀티버스가 판 치는 21세기에 종이 교정을 보며 시대를 역행하는 업계는 여기말고 또 어디가 있을까. 나름 전통 지켜가면서 인쇄 교정을 고수하는 슈타이들을 보며 괜시리 부러움 반 질투 반 섞인 헛웃음을 지어본다. 그래도 얘네들은 철학이라도 있지, 나는…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2층을 해치우고 3층에 올라가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다.


We are not doing the books to make money. 

                                                                               We are doing the books because we want to make.”


부럽다.

전 직장은 대표가 인격파탄자여도 이런 경영 철학이 어느정도 맞았던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얼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진하게 들었다. 

이것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긴 한데, 내가 하고 있는 게 ‘진짜’ 책을 만드는 행위가 맞나?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느순간 그냥 돈 버는 수단으로서 책을 선택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대표 아래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생각으로 침잠해져 갈 때, 마지막 층에서 한 벽면을 채운 글을 본다.


그것은, 그래, 기쁨이었다, 랄까.

근 3여 년간, 내가 어떤 것을 짓고 싶었던지 스스로 갈구하고 고뇌하던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기쁨.

지금 당장 내게 닥쳐온 번아웃과 한탄을 지워버리는 듯한 그런 깨달음. 


단순하게 책을 짓고 싶다는 그 생각을 해왔던 나에게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 문장이 되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근래에 나의 여러 생각이 겹쳐졌다. 우리 대표는 출판사를 ‘크리에이터’라고 표현한다. 그럴 듯하긴 하다. 그런데 나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에디터일 뿐. 굳이 표현하자면 확성기다. 저자의 생각을 세상에 널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커넥터다. 저자와 독자를 잇는 연결자. 거기에 저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존재. 난, 그런 존재가 되면 안될까. 저자의 생각을 왜곡되지 않게 전달하는 사람.


책은 내게 단순한 사물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그것의 강한 물성적 매력에 이끌려 오늘날의 내가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타산지석’이다. 지금 있는 곳도 어찌되었든 긍정적인 무언가를 알려주리라 생각한다. 오늘을 버티면, 내일을 버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오늘 든 현타를 잠시 고이 접어 나빌레라, 마음속에 숨겨두고 내일을 버텨야겠다.








책은 단순한 사물 그 이상이다.

책은 시공간을 넘어 이야기, 생각, 감정을 전달하는 그릇이자, 살아있는 존재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를 제본하거나 텍스트를 페이지에 맞도록 편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을 창조하고, 독자와 제작자, 내용과 형식 간의 대화를 만드는 예술이다.


책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다. 

책은 디지털 시대에 가려진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책은 살아있고, 활력이 넘치며, 역동적이다.

책은 만질 수 있고, 친밀하며, 개인적이다.

책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물리성과 물질성, 그리고 손과 눈, 마음 사이의 열결을 기념하는 예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