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본질이 있으며, 그것은 욕망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과장된 걸까요.
저의 손에도 손금이 있는데요 인간은 자신의 손에 꽉 움켜쥐고 싶은 욕망이 아기 때부터 있으며 그 증거가 손금이라고 이야기하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저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작품을 꼽으라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꼽겠습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커피 브랜드 중의 하나인 스타벅스가 이 작품의 일등항해사의 이름인 스타벅에서 유래했고, 스타벅스의 마크인 사이렌 또한 바닷사람들을 홀리던 인어 세이렌을 형상화했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에 대한 흥미를 돋우기도 합니다.
작품의 뒤편에는 옮긴이의 글이 붙어있는데-해설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옮긴이는 멜빌이 작품을 통해 백인이 흑인을 몰살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폭력적인 과정이 모비딕에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했으나, 저는 이 작품을 모비딕을 향한 에이해브 선장의 끝없는 대결이라는 서사적 요소,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요소, 등장인물들을 통한 인간 본성의 탐구라는 세 가지 요소로 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작품의 형식으로는 소설의 형식과 연극의 형식을 겸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만의 독창성도 엿보인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봅니다.
작품의 첫 문장은 작품의 화자가 자신의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며 시작합니다. 이슈메일은 세상에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고 배를 타고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싶다는 목적으로 바다로 나가게 되며, 특히 고래에 대한 호기심에 고래잡이배에 타기로 결심합니다. 낸터컷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려던 이슈메일은 뉴베드퍼드에 묵게 되고 그곳에서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인 야만인 작살잡이 퀴퀘그와 만나게 됩니다. 이후 그와의 우정은 피쿼드호에 함께 탑승하여 운명을 함께 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이슈메일은 고래잡이 출신인 매플 목사의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교도로 생각되는 퀴퀘그를 보게 되어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퀴퀘그는 코코보코라는 섬나라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에 대한 선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래잡이로 일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보다 더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얼마 동안 배를 타고 세상을 더 돌아다녀 보기로 하여 그곳에 있게 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슈메일은 피쿼드호를 선택하고, 피쿼드 호의 선주인 펠레그 선장과 빌대드 선장과 계약을 맺습니다. 작살잡이인 퀴퀘그 또한 함께 배를 타게 됩니다. 배를 타기 전 이들 앞에 일라이저라는 이름의 사내가 나타나 피쿼드호와 에이해브 선장의 운명에 대한 부정적인 예언을 건네 이들의 기분을 언짢게 합니다. 이슈메일은 얼핏 네댓 사람이 피쿼드호에 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이들은 배에 올라 출항하게 됩니다.
피쿼드호에는 선장인 에이해브부터 일등항해사인 스타벅, 이등항해사인 스터브, 삼등 항해사인 플래스크가 있고, 이하 작살잡이들, 선원들, 대장장이, 목수, 요리사 등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습니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낸터컷 토박이에 퀘이커교도 집안의 큰 키에 성실한 사람이었고 피쿼드호에 오른 사람들 중 가장 이성적인 인물로 비칩니다. 이등항해사인 스터브는 낙천주의자였으며, 겁쟁이도 용감한 자도 아닌 사람이었고, 삼등 항해사 플래스크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입니다. 이들에게는 작살잡이들이 하나씩 종자로 짝 지워졌는데, 퀴퀘그는 스타벅의 종자, 인디언인 카슈테고는 스터브의 종자, 흑인인 다구는 플래스크의 종자였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은 좀처럼 배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위도가 낮아져 따스해질 즈음 나타난 이후 매일 나타났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고래에 대한 이슈메일의 자세한 구분과 설명이 이어지고, 고래잡이배에서의 식사문화, 돛대 꼭대기에서 고래를 망보는 이야기 등이 이어집니다.
에이해브 선장은 어느 날 저녁 이례적으로 전원을 집합시켜 스페인 금화를 내밀며,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고 아가리가 우그러진 흰고래, 모비딕을 발견하는 자에게 금화를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스타벅은 선장의 광기에 반대 의견을 표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선장의 뜻에 찬성하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입니다. 에이해브 선장의 모비딕에 대한 아집은 다리를 잃은 순간에 생긴 것은 아니고, 이후 그의 찢긴 몸에서 나온 피와 영혼에서 흘러나온 적개심의 피가 섞여 지금의 광기에 이르게 되었다고 작가는 서술합니다.
모비딕을 향한 항해이지만 포경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나 싶던 순간, 첫 번째 고래 추적이 시작되자,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이 몰래 밀항시킨 페달라를 포함한 다섯 명의 선원이 나타납니다. 선원들은 그들의 존재가 못마땅하지만 이내 그들의 존재는 선원들 사이에 묻히게 됩니다. 고래를 잡고 고래를 해체하여 기름을 짜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고, 고래잡이 중에 다른 포경선을 만나면 이루어지는 사교방문에 대해서도 서술됩니다. 에이해브 선장은 다른 선장들과 달리 다른 포경선과의 사교 방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 배가 모비딕을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래기름을 채취하다 고래에 빠진 선원을 구한 퀴퀘그가 병에 걸리게 되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관을 짜게 되는데, 그는 건강을 되찾고 훗날 그 관은 부표로 활용되게 됩니다.
에이해브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배들과 달리 새뮤얼 엔더비호는 그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모비딕에게 팔을 잃은 선장이 타고 있었고, 모비딕을 두 번 보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레이첼 호를 만나는데, 선장은 흰고래를 보았다고 했고,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선원들이 난파되었다며 함께 구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에이해브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항해를 계속하여, 드디어 에이해브와 피쿼드호는 모비딕과 조우하게 됩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들은 모비딕을 쫓지만 이들은 모비딕에 의해 전원 침몰합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이슈메일인데, 그는 퀴퀘그의 관으로 만든 부표를 잡고 자신의 선원들을 찾던 레이첼호에 의해 발견되어 구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작품을 읽고 느낀 점을 나누어 봅니다.
첫째, 에이해브 선장과 흰고래 모비딕의 대결은무슨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완역본을 읽기 전 요약본을 읽고서는 이 작품이 인간의 집착과 광기에 대한 폭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생각이 바뀐 것이 에이해브 선장의 모비딕에 대한 집착은 광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이면은 인생의 비극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딕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바다가 아닌 육지로 숨을 수도 있었지만, 에이해브 선장은 더 값진 목숨을 걸고 모비딕과의 정면 승부를 선택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그 죽음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한다면 인간은 죽음을 극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에이해브 선장의 선택은 인간 전체가 자신들의 운명과맞서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보았다.
둘째, 앞서 에이해브 선장의 경우도 그렇지만 작가는 작품을 통해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인간 전체로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고 해석해 보았습니다. 작품의 서술자인 이슈메일의 경우,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본명이 아닌 가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슈메일은 성경의 이스마엘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바다로 상징되는 세상을 방황해야만 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등장하는 창세기부터, 조로아스터교, 배화교까지 기독교부터 이교도를 모두 아우르는 종교적 배경 또한 모든 인간을 포용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슈메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슈메일은 피쿼드호에 탑승한 다른 어떤 사람보다 목적이 흐릿한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고래잡이에 대해 궁금증을 느껴서 바다로 나선 인물이며, 그의 동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가 없어진 니힐리즘적 요소가 보입니다. 그러한 그가 피쿼드호에 탑승하여 고래잡이에 나서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은 허무하고 헛되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이 작품은 고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초창기 포경업과 고래잡이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적 가치를 가집니다. 정신 착란을 일으켜 죽은 아버지의 광기를 물려받은 게 아닐까 걱정했던 멜빌은 실제 21세에 뉴베드퍼드에 가서 포경선에 일반 선원으로 고용됩니다. 작품 속 고래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포경선 선원들의 생활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사실 중의 사실인 것입니다.
작품을 읽다가 고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고래잡이들의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어진다면, 러시아 고전에서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읊조린 것과 동급으로 여기는 대신 자세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최소한 세 가지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읽고 고래의 생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 들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작품을 읽다 보면 고래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됩니다.
넷째, 흰 향유고래인 모비딕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에이해브 선장이나 모비딕에게 당한 사람들은 모비딕을 인간을 괴롭히고 죽이는 악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스타벅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모비딕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반응하는 것일 뿐, 최초 인간이 공격하지 않았다면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옮긴이의 주장과 같이 모비딕을 문명인에게 공격당한 야만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멜빌은 기독교 문명의 악의 요소, 군대와 전쟁으로 상징되는 계급사회의 악의 요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하는데, 모비딕뿐만 아니라 야만인이며 이교도인 퀴퀘그가 기독교인들도 비참하고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비딕을 통해 작가는 세상 속 악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악의 본질이 야만을 공격하는 문명의 가면 속에 숨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모비딕을 쫓는 중에 에이해브는 독백을 합니다. "흰고래도 인간도 악마도 이 늙은 에이해브의 진정한 본질,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 본질은 건드릴 수 없어"라고. 작가가 어쩌면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인 모비딕이라는 고래를 상정함에 있어, 사실은 모비딕조차도 인간의 본질을 건드릴 수 없다는 숭고한 선언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나는 여기에 더해 인간을 창조한 신조차도 인간의 본질은 건드릴 수 없다고 감히 선언하는 멜빌의 모습을 보게 되고, 모비딕을 발견하면 상으로 주겠다던 금화에 환호하는 선원들처럼 우리도 멜빌의 주장에 환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