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 두번째] 사랑이라는 공을 쏘아올리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by hongfamily

인간의 본질 내지는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뺄 수 있을까요.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이 있다고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큰 의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저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이 작품집은 첫 작품인 뫼비우스의 띠에서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수학선생님의 이야기로

끝나는 소위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있는 작품으로,

수학선생님의 이야기가 이 소설집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수학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독특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독자들의 관점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한 아이는 그을음이 전혀 없는 깨끗한 얼굴이다.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을 것이라 답합니다.

교사는 아니라고,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상대를 보고 자신이 더러운 줄 알고 씻을 것이라 합니다.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아이들은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을 것이라 답하지만 다시 아니라고 합니다. 함께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아이만 얼굴이 더러운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요.

우리가 이 작품을 바라보아주었으면 하는 관점을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에서 꼬집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하면서도, 있어서는 안 될, 있을 수 없는 현실이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품에서 작가는 이런 문제를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으로 비유함으로써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모순과 역설로 해석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난장이는 철거촌에서 3명의 자식과 부인을 부양하는 실제의 난장이이며,

이 작품은 그의 아들 영수가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조를 결성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사업주를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난장이와 거인으로 대별되는 가난한 자와 가진 자, 노동자와 사용자, 약자와 강자의 대립된 세계에서 약자인 난장이 편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묘사하고 있지만, 과학자, 노동자, 교회 목사, 신애, 지섭, 윤호 등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중간자들을 통해 양편의 대화와 타협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끝내 두 세계의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는 영수가 사업주를 살해하는 것이, 비극이라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두 세계의 타협이나 주인공 난장이 가족의 행복이라는 해피엔딩이었다면 얻을 수 없는 효과를 작가가 얻어냈기 때문인데,


마지막에 영수가 사업주를 살해하고 재판을 받는 장면을 통해 독자들을 이 사건의 참관인으로 참여시키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난장이는 없는가?

우리 사회는 부의 분배에 있어 공정한가?

우리는 난장이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난장이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라 생각했으며, 영수 또한 방법론에서는

달랐지만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난장이와 거인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임으로써 독자들에게 사랑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어렵다는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의미하며, 중세시대의 견고한 가치를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무너뜨리듯이, 비록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지라도 사랑이라는 가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모순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작품에서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부가 편중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 집을 잃어가는 현실을 화자들의 이야기 곁에 담담하게 풀어나갑니다. 굴뚝을 청소했다는데 얼굴이 하얀 아이처럼, 산업화의 혜택은 자본가가 독점하고,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가 지게 되는 현실 모순 아닐까요?

이외에도 작가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극단적 차이를 강조합니다. 영희에게 독일은 난장이들을 위한 도시가 있는 그들을 위한 유토피아이지만,

자본가에게 독일은 또 다른 착취의 수단을 연구하기 위한 견학의 장소이듯이요.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를 요구하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자본가에게 행복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약을 먹이겠다는 계획으로 형상화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칼이 있지만, 자본가에게는 총이 있고,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필요에 의해 사회적 울타리 안에 갇혀 살지만, 자본가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칩니다.

글 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슴을 후벼놓습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이야기 속 신애는 중산층 계층의 여인입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우리는 난장이냐고 재차 묻습니다.

우리는 난장이인가?

난장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난장이가 아니어서인가?

자본가가 먹인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약을 먹어서인가?

최근, SNS를 통해 알려진 바 있는 재벌들의 갑질 횡포를 보며 국민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최근 에세이 코너에 쏟아져 나오는 위로하고 공감하는 종류들의 작품들은 어쩌면 이야기에 나오는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는 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작가들이 그런 의도로 작품을 썼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회 현상과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겠지요.

만약 언론이나 작가들이 난장이와 거인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자들이라면 난장이들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작은 한걸음을 옮기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각자는 난장이일 수밖에 없지만, 일만 년 뒤의 미래를 꿈꾸며, 사랑으로 하나 되는 세계를 꿈꾸며, 조금씩 실천할 우리의 과제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해야겠다 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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