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첫번째] 희망의 흰 손수건
숨그네 - 헤르타 뮐러
by hongfamily Aug 28. 2021
고전소설을 통한 인간탐구의 첫 번째 작품으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소개드립니다. 이 작품을 통해 제가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도출해 낸 과정을 따라가 보시겠습니다.
'숨그네'라는 제목은 '숨'과 '그네'의 합성어로서 작가가 만들어 낸 말인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숨이 그네 타듯 널뛰기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단어들은 제목에서뿐만이 아니라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나'로 제시된 '레오'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헤르타 뮐러가 알게 된 실재 인물 오스카 파스티오르 이며,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는 숨그네를 비롯하여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감자인간'.'양철키스','볼빵'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의 조어들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 또한 수용소에서의 삶을 소재로 한 수용소 문학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성인이 아닌 청소년이기에 어른의 관점이 아닌 아이의 관점으로 접한 수용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있겠고, 앞서 오스카 파스티오가 시인이었기에 시적인 언어가 등장한다는 점. 헤르타 뮐러 또한 단어의 사용에 대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느껴질 정도로 작품의 묘사나 단어 선택이 타 작품과는 차별성을 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이 작품은 수용소의 비극성이나 참혹상을 고발하려는 목적보다는 실존하는 수용소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념의 수용소로 확장하여 공감대를 이끌어낸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레오가 수용소에서 나와서도 버리지 못하는 배고픔과 식욕에 대한 문제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 수용소 문학을 접할 때에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주인공은 수용소에서의 현실을 한걸음 물러나서 바라보았기에 헛된 기대감과 절망감으로 죽는 대신 살아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레오는 동성연애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비록 조금 더 가혹하고 조금 더 힘들었을지언정 수용소는 그에게 도피의 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레오의 상황이 레오가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선 작품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1945년 아직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에 시작된다. 레오는 러시아 수용소행 명단에 이름이 올랐지만, 그는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잘 된 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동성연애에 빠진 주인공은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데 대한 두려움과 가족들에게 치욕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향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짐 싸기는 시작되고 레오는 수용소행 열차에 오른다. 수용소에서 레오를 기다린 건 지독한 배고픔과 고된 노동이었다.
시멘트 이야기나 석회 여인들의 이야기, 심장삽 이야기, 석탄에 대한 이야기, 노란 모래, 슬래그 벽돌, 일광 중독, 지하실 작업, 슬래그, 화학성분과 같은 이야기들은 레오가 수용소에 있으면서 고된 노동을 경험하며 느낀 점들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로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수용소의 관리자들이 피복을 빼돌려 그나마도 부족한 피복을 배급받지 못하고 얼어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식당 뒤편의 찌꺼기를 파내 먹거나, 구걸하러 다니는 모습 등이 그런 부분들을 보여준다. 죽은 사람에게서 옷을 벗기고 빵을 꺼내는 장면은 작품을 읽다 보면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게 돼 잔인하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어느 밤 갑자기 포플러 나무를 심는 작업을 위해 동원된 수용자들이 자신들이 그날 밤 총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레오가 수용소에 있는 석탄을 들고 러시아 마을로 구걸을 나갔을 때, 자신도 똑같이 아들을 수용소에 보내고 레오를 친 아들처럼 여겨 식사를 대접하고 하연 손수건을 선물하는 장면에서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버려진 도관인 체펠린은 인간의 욕망의 실체를 보여준다. 길이 7~8미터에 높이 2미터인 버려진 관 안에서 수용소 여성들은 독일군 전쟁 포로들과 성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빵 도난 사건'을 통해 빵을 훔쳐 갔다는 이유로 카를리 할멘을 무참히 처단하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봄과 동시에 인간의 식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다시 느끼게 된다. 늘 배고픈 수용자들은 자신의 빵보다 남의 빵이 더 커 보이기에 빵을 바꾸는 유혹에 빠져든다. 수용자 중에 법무사 파울 가스트가 자신의 죽어가는 아내의 수프를 빼앗아 먹는 모습은 역겨우면서도 안타깝게 보인다.
어느 날 레오는 자신의 고향땅이 바뀌는 꿈을 꾸고 로머에게 해몽을 부탁하는데 해몽 결과 그에게 남동생이 생긴 듯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한다. 결국 어머니로부터 자신에게 동생이 생겼다는 짧은 메시지를 받고 레오는 그 아이를 대리 형제라고 치부하는 한편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수용소의 마지막 해 레오를 비롯한 수용자들은 임금을 받고 맛있는 음식들을 사 먹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는 한편, 문란한 성관계를 맺기도 한다.
레오는 오 년의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가족들과 동화되지 못하고 상자 공장에 취직하여 삶을 이어간다. 레오는 자신의 과거를 공책에 쓰기 시작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진실되게 기록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기록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커다란 불행이라 느낀다.
레오는 대학에서 콘크리트 기사 양성과정에 등록하는가 하면, 에마라는 여자를 알게 되어 결혼도 하지만, 그는 동성연애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버린다.
작품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해봅니다.
첫째, 주인공이 삶의 끊을 놓지 않고 버티게 해 준 것, 그 반대의 것들에 대해 살펴보게 됩니다.
레오의 할머니가 레오에게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건넨 말은 레오가 배고픈 천사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러시아 여인에게 받은 하얀 손수건도 레오에게 손수건이 자신의 운명과 동일하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레오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수용소에서 레오가 작업을 할 때 사용하던 심장삽 또한 레오의 배고픔을 잊게 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게 해주는 희망의 존재입니다.
반면, 어머니가 동생을 가졌다는 소식은 레오에게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대체품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여 희망을 앗아가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둘째,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수용소에서 돌아온 자와 고향에 남아있던 자들 사이에 시간의 골이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으면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다시 만나도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합니다. 이들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수용소 동지들과의 교류가 치유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아픈 과거, 치욕스러운 과거와 동일시되기에 이들은 수용소 동지들을 서로 외면하지요.
레오가 수용소 동지였던 이발사 오스발트 에니예터에게 받은 편지를 보고 아버지가 '너 빈에 아이 있니'라고 묻는 것이나, '누가 알겠니, 너희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고 말하는 부분은 수용소에 갔던 사람과 남은 사람의 괴리가 얼마나 큰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괴리는 레오가 자신의 경험을 노트에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속이고 숨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게 종용합니다.
셋째, 배고픈 천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배고픈 천사는 레오가 수용소에서의 굶주림을 표현한 조어로서 레오는 각자 자신만의 배고픈 천사를 안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레오는 수용소를 나와서도 여전히 정상적인 식사를 못하고 허기진 식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식사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작가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확장시키는 장치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배고픈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의 수용소와 이념의 수용소가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 구속도 아니요, 힘든 노동도 아니요 바로 '배고픈 천사'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조금 더 좋은 것, 조금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아비규환 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이러한 우리 모두는 레오처럼 각자의 배고픈 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요, 그렇기에 우리 또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넷째, 작가는 수용소의 삶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배고픔이라는 욕구는 '빵 도난 사건'에서 빵 하나를 두고 살기를 머금고 달려드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임을 입증하며, 체펠린이라는 도관 안에서의 성관계, 그리고 수용소 생활 막바지의 문란한 성관계는 인간에 있어서 성욕이 얼마나 원초적인 것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레오의 동성애 또한 인간의 본연적 욕구로 볼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볼 일인 듯하지만요.
작가는 레오를 통해 그린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노래하고자 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실존적 수용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수용소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용소에서의 삶을 종용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면 공감할 수 일을까요?
우리는 '숨그네'를 통해 수많은 절망을 보지만, 그에 못지않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러시아 여인이 레오에게 건넨 흰 손수건은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절대적 희망이 되는 손수건을 건네자는 것. 이 손수건, 또는 희망은 도움이 필요한 타인에게 건네야 하겠지만, 동시에 각자가 스스로의 배고픈 천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건네야 할 늘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