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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Nov 09. 2020

로마의 시작, 포폴로 광장

포폴로 광장의 역사



밤 늦게 도착한 로마는 여느 대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테르미니 역은 여기가 로마라고 말하는 듯 로마의 시그니처인 아치들은 나즈막하게 건물 벽면에 길게 깔려있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정신없는 교통의 허브라고 이야기하는 유럽최대 규모의 기차역이라고 불리기엔 분위기가 한참은 가라앉아있었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로마를 맞이한 첫 날이 아쉬워 역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숙소에 늦을까봐 여행가방을 들고 부랴부랴 테르미니 역을 빠져나왔다. 숙소에 도착하고 밤 10시 이후는 위험하니 밖으로 나가지말라는 집주인의 조언으로 짐을 풀고 곧장 잠이 들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테르미니 역 풍경


다음 날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뜨니 평소에는 들을 수 없었던 창 밖에서 울리는 공기소리에 내가 다른 장소에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아침일찍 보르게세 미술관 투어가 있다는 걸 깨닫고, 일찍 거리로 나섰다. 로마의 아침 거리를 빨리 걷고 싶었던 탓이다. 길가에 자동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는 거나 도로마다 출근시간이어서 차들이 도로에 정체되어 있는 모습도 여느 다른 도시와 다를바 없었다. 


숙소에서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가는 길



하지만 돌아서는 골목마다 나타나는 크고 작은 오래된 건물들을 구경하느라 여유있게 걷다보니 겨우 시간에 맞춰 미술관 투어를 하는 무리와 만났다. 나는  오전내내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낸 후, 곧장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이 열연한 스페인 광장에 갈 계획으로 커다란 보르게세 공원을 가로질러 핀초공원에 다다랐다. 핀초공원 끝에 전망대처럼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빨리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곳으로 내달려 갔다. 도착하니 난간 너머로 아주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높게 우뚝 서 있었다. 

핀초 언덕에서 바라몬 포폴로 광장의 모습. 저 멀리 바티칸 시국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글귀대로 이곳은 로마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테르미니 역이 생겨나기 전까지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었던 포폴로 광장의 유래는 명확하게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주 오래 전, 이곳은 포플러 나무 숲이 있는 로마황제 네로의 묘지 터였다고 한다. 포플러(Poplar) 나무는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민중(Populace)의 어원과 같다. 그래서 이곳을 포폴라 광장, 즉, 민중의 광장으로 불리고 있다. 


광장은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과 여느 로마의 광장과 다를 것 없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광장은 세 갈래로 뻗어나가는 길 때문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로마로 들어가는 세 개의 길 중 하나인 바부이노 길(Via del Babuino)은 스페인 광장과 연결되어 있고, 코르소 길(Via del Corso)은 베네치아 광장과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 기념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리페타 길(Vid del Ripetta)은 현재와 같은 길이 아니라 당시에는 순례자들이 바티칸으로 가는 길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은 로마로 들어가는 아주 좋은 위치였기에 포폴로 광장은 외부인이 들어오는 첫 관문의 역할을 하기에 아주 좋았던 것이다. 


포폴라 광장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있는 포르타 델 포폴로(Porta del Popolo)라는 성문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t. Maria del Popolo) 성당, 오벨리스크와 분수, 그리고 쌍둥이 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포폴로 광장 평면도


로마는 15세기에 들어서자, 포폴로 광장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정비하고, 16세기에 로마 전역에 18개의 분수를 만들어 물을 공급하면서 포폴라 광장에도 분수를 두었다. 그리고 기원전 13세기 경 이집트에서 세티 1 세와 람세스 2세가 만든 오벨리스크를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31년에 로마로 가져온 것을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이곳 가운데 세워 광장의 위엄을 갖췄다. 


포폴로 광장의 오벨리스크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조각가 베르니니를 불러들여 성문 파사드와 성문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파사드를 바로크 양식으로 재정비했는데, 이는 개신교에서 카톨릭교로 개종하고 자신의 국가를 떠나 로마로 온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를 환영한다는 의미였다. 성문 상단을 보면, 참나무 가지 위에 일곱 개의 언덕과 별 모양은 알렉산더 7세를 상징하고, 참나무 가지 끝에 밀 이삭은 스웨덴 왕실을 상징한다. 이로써 로마의 교황권과 스웨덴 왕실이 만남으로 긴밀한 정치적 동맹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스웨덴 왕실을 포기하고 로마 카톨릭의 일부가 되는 것은 로마 교회의 권력를 강화할 수 있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기에 누구나 볼 수 있게 로마의 첫 관문인 포르타 델 포폴로 상단에 그들의 관계를 누구나 볼 수 있게 자랑스럽게 새겨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문 파사드를 보면 다른 건축과는 달리 디테일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단 1년 안에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포르타 델 포폴라 내부 파사드(가운데)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우측) / wikipedia
오벨리스크 뒤로 보이는 포르타 델 포폴라 내부 파사드

알렉산더 7세는 외부인이 포르타 델 포폴라에 진입하면 오벨리스크로 시야가 가로막혀 가운뎃 길인 코르소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 개의 길 초입에 성당을 만들어 길이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교황은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Carlo Rainaldi)에게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i Miracoli)과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Chiesa di Santa Maria in Montesanto) 건축을 의뢰한다. 건축가 라이날디는 두 성당이 오벨리스크를 가운데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보이길 바랐다. 그러나 두 성당 형태를 똑같이 만들면 성문에서 바라봤을 때, 시각적으로 두 성당이 조금 달라보여서 왼편에 있는 산타마리아 인 몬테 산토 성당의 돔을 약간 타원형으로 만들고, 오른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은 원형 돔으로 만들어 시각적으로 두 성당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게 했다. 


오벨리스크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보이는 쌍둥이 성당 / wikipedia


그렇게 포폴로 광장은 오랜 시간 아무 변화없이 유지되나 싶었으나,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이 로마를 정복하면서, 광장에도 변화가 생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건축가 주세페 발라디에르(Giuseppe Valadier)에게 광장 리노베이션을 맡긴다. 그는 오벨리스크 주변에 사계절을 나타내는 4개의 동상이 있는 분수를 만들고 핀초언덕에서 광장으로 내려오는 길을 계획하고, 광장에서 바티칸 시국으로 가는 길인 동서 가로축을 계획했다. 그리고, 사다리꼴의 광장을 타원형으로 변경하는 계획을 세웠다. 포폴로 광장의 메인 스트림이 성문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남북에서 핀초언덕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동서로 바뀌었다. 발라디에르의 포폴로 리노베이션 계획은 나중에 나폴레옹이 로마에서 물러나고 나서 실제로 실행되어 현재 우리가 핀초 언덕에서 포폴로 광장과 바티칸 시국, 그리고 로마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포폴로 광장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광장에서 올려다 본 핀초언덕 전망대
포폴로 광장에서 관광객과 시민이 함께 즐기는 모습


포폴로 광장은 오벨리스크와 같은 이집트 양식에서부터 르네상스 그리고 바르크를 지나 신고전주의 양식까지 아주 오랜 기간동안 꾸준히 변화해 온 로마의 상징이기도 하다.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으로 과시해 온 장소였던 포폴로 광장은 비로소 오랜 시간을 버텨내 정말 오롯이 시민의 곁으로 돌아온 광장이 되었다. 


나 역시 외부인의 신분으로 세 갈래의 길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이 광장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이탈리아 여행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애석하게도 내 심각한 결정장애가 여행 첫 날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코르소 길로 가서 베네치아 광장을 들러 포로로마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바부이노 길로 가서 스페인 광장을 갈 것인가, 아니면 리페타 길로 가서 평화의 제단을 볼 것인가 한참을 그늘 한 점 없는 광장 위에 서서 고민하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에 이끌려 바부이노 길로 들어갔다. 여행길에서 결정하기 어려울 때는 대중에 몸을 맡기면 역시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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