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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Dec 06. 2016

계속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커서 뭐가 될까? _ 여행은 삶 #10

#. 가슴 뛰는 걸 알아차리기


종종 배가 아팠다. 할레 대학의 자유로운 작품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 삶은 그뿐이라고 말하는 오슬로의 그녀 앞에서. 그렇게 살 수 없는 나라에서 많은 걸 포기하고 떠나온 우리는 종종 배가 아팠다.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융은 쪽잠 자며 밤샘 알바를 했고 난 주말 휴일 할 것 없이 일을 했다. 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여기까진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괜찮다. 우릴 더 초라하게 만든 건 돌아가면 또다시 미세먼지 가득한 앞날을 평생 막히는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현실의 막막함이었다. 긴 여행이 끝나가지만 여전히 뿌연 길 위에 서 있는 기분. 언제쯤 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그뿐인 삶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던 장기 여행자의 일상에도 묘하게 규칙적인 것들이 존재했다.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날엔 대용량 하드에 잔뜩 쌓인 영화들을 하나 둘 꺼내 봤고 괜찮은 공연이나 전시가 있단 현지 정보를 운 좋게 얻은 날엔 밤낮 가리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가 있는 곳엔 늘 음악이 흐르거나 입이 떡 벌어지는 작품이 있거나 기똥찬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건 왜였을까. 마음이 자연스레 몸을 그곳에 데려다 놓은 걸까. 가슴을 뛰게 했기 때문일까. 누군가의 정성이 듬뿍 담긴 창작물에 둘러싸여 얘기할 때 우린 가장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그래, 우린 뭔가를 소비하는 것보단 생산해내는 걸 좋아하는 그런 생산자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지! 맞아! 오랜 여행 막바지 뿌연 길 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그건 결국 내가 언제 가장 즐겁더라, 뭘 할 때 가슴이 뛰더라. 그런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조금은 구체적인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 서로를 위한 가장 근사한 선물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이었다. 여행비를 모으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짬짬이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여느 연인들처럼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유람선을 타거나 일회부터 빠짐없이 갔던 쌈사페에서 몸을 흔들거나 맛집을 찾아가 밥을 먹었다. 그 시간들은 융의 수첩 속에 그림으로 내 일기장에 글로 차곡차곡 남겨졌다. 함께 한 시간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하는 건 서로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생일이나 기념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창작 동기가 되어 주었다. 연인이 된 후 첫 번째 융의 생일날. 나는 융이 그린 그림들을 프린트해서 만든 티셔츠를 입고 그가 야간 알바 중인 편의점으로 향했었다. 그때 첫차에 오르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방 속엔 그의 여러 그림으로 만든 티셔츠와 에코백도 담겨 있었다.


내가 처음 받은 선물도 잊을 수 없다. 융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의 방'을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에 난 잘 모르는 작가라 작품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함께 맞는 첫 생일에 남자 친구가 내민 이 작고 까만 상자가 신기해서 한동안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융은 상자 정면에 뚫린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뚜껑을 씌운 상태로 내게 건네면서 뚜껑을 벗기고 그 안을 봐봐,라고 말했다. 그때 한쪽 눈을 감고 또 다른 눈을 조심스레 들이대며 그 안을 들여다봤을 때 전해지던 황홀함은 뭐랄까. 그 안에는 수많은 반딧불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마치 별무리가 춤추는 우주 같았다. 신기해서 또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이걸 어떻게 만든 거냐고 물었다. 융은 동네 유리 가게에서 직접 주문한 유리를 이어 붙여 상자 내부를 만들고 그 윗면엔 크리스마스 조명 같은 꼬마전구를 붙였다. 그리고 바닥 면에는 검은 물을 채워 넣어 상자 안을 들여다볼 땐 현실의 공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물빛에 반사돼 일렁이는 불빛들이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과 흡사한 느낌을 준 거다. 융은 자신이 처음 이 작품 속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을 나와 공유하고 싶어 이걸 만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직감했다. 지금껏 살면서 받아본 것 중 가장 근사한 선물이라는 걸.


쿠사마 야요이의 'infinity mirror room'을 모티브로 융이 만든 'infinity mirror box' (30x50x30(cm), 가로x세로x높이)


루지애나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infinity mirror room' 안에 들어가 촬영한 우리 모습


그리고 칠 년 후 우리는 코펜하겐에 갔다가 우연히 루지애나 미술관에서 실제 전시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 전시 때와는 달리 최대 인원을 두 명으로 제한하고 관람 시간에는 제한이 없어서 훨씬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사전에 이 전시에 대한 정보 없이 갔다가 괜한 우연에 더 반갑고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여행 중에 우연히 융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을 다시금 떠올렸고 덕분에 이 미술관도 작품도 우리에게 각별한 장소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 유일한 관객을 위한 열정적인 작가가 되기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만 매진했다. 고 쓰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융은 그만뒀던 학교에 일 학년으로 재입학했고 그때부터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쉴 새 없이 졸업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 역시 동종업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일을 모색하며 바쁘게 살아갔다. 그렇다고 우리를 가슴 뛰게 하는 일들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물론 좋아하는 관심사로 인정받을 만한 전공이나 타이틀을 얻지도, 시장에 내놓을 만한 작품을 만들 수도 없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틈틈이 하고 싶은 걸 했다. 일상의 면면엔 우리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채워 넣을 만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거기에 우린 서로에 대한 애정과 친구들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듬뿍 넣어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만들었다.


통 읽고 싶은 책이 없어 방황하던 어느 날. 이렇게 읽을 책 없다며 불평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읽고 싶은 책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잔 생각을 했다. 힘들 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글을 쓰신 분은 얼굴 한 번 뵌 적 없지만 거진 십 년을 알고 지낸 블로그 이웃이었다. 책을 만들기 위해 난 한 달간 일 끝나면 집으로 와 쉬지도 않고 새벽까지 글을 고르고 목차를 만들고 편집을 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어떤 전문 지식도 없었지만 내내 설렜고 즐거웠다. 책의 마지막에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옮겨 쓴 그분의 글을 넣었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책은 그분의 칠십 평생 첫 책이 되었다. 책을 건네던 날의 두근거림. 책을 가지고 서울에서 다섯 시간 버스로 달려 그분을 만나고 이틀 밤을 함께 지낸 일. 쉽게 닳지 않도록 가슴 깊이 묻어 놓았다. 그때 알았다. 단 한 명의 독자를 생각하고 만든 책이 이토록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들 수 있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만들어 본 책. 블로그 이웃이 십이년간 썼던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


생각해 보면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스스로 열정적이고 또 금방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서른을 그냥 넘기기가 아쉬워 친구들을 모아 서른즈음에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고 틈틈이 친구들의 사진을 모아 사진책이나 엽서로 만들어 선물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으로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이 정말 너무 좋았다. 또 지난해 알게 된 친구가 고양이 책방을 연다고 했을 때 나는 뭘 선물하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의미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난 오 년간 동네에서 틈틈이 찍어온 길고양이 사진들을 몇 장 골라 엽서로 만들어 선물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록해 온 일상의 기록들이 곁에 있는 친구들과 공유될 때 기쁨은 두배가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렇게 일상의 면면에서 나는 쉬지 않고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동네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찍은 길고양이 사진들을 모아 '숨은 고양이 찾기'라는 제목을 붙여 엽서를 만들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꾸준히 만들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서로에게도 영향을 준 걸까. 작년에 내가 책을 만들며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융은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팝업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 역시 이 주간 쉬지 않고 심지어 꼬박 야근하고 돌아온 날에도 매일 새벽까지 만들었다는 그 팝업북 안에는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이 들어있었는데 함께 강아지와 있는 모습, 우는 모습, 빨간 장화를 신은 모습. 어린 시절의 우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게 귀여워서 동영상으로 찍어 두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사진으로 융이 만든 팝업북


작년 크리스마스 때 팝업북을 선물 받은 나는 올해 융 생일에 두 번째 책을 만들기로 했다. 책이라기 보단 지난 칠 년 간 융이 그린 그림과 일러스트, 그리고 영상작업을 모은 도록에 가까웠다. 만들고 보니 무려 팔십 페이지 가까운 책자가 되더라. 완성된 책을 받아보니 그럴싸해 보여서 뿌듯했다. 도록을 만들며 가장 공들인 부분은 제목이었다. 대부분 제목이 없던 융의 일러스트에 어떻게 제목을 붙이면 좋을까 고민하다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엔 몇 년 전 대대적 책 정리의 난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살아남은 책들이 어지럽게 꽂혀있었다. 우리가 끝내 버리지 못한 책들의 제목을 보니 융의 그림과 어울리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 동안 마흔 개 넘는 일러스트에 어울리는 책 제목을 뽑아 붙이는 작업을 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남겨 뒀었구나 한동안 가까이 가지 않았던 책장의 추억을 곱씹어 보며 선물을 만드는 시간이 내게도 선물 같은 시간이 되었다.


지난 칠 년간 융이 만든 작업물들을 모아서 내가 만든 도록


돌아보니 참 꾸준했다. 내가 즐거운 일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꾸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다. 일상에 주어진 기회로 우리는 옷을 만들고 팝업북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고 엽서를 만들면서 디자이너가 되었고 사진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었다.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이 유일한 관객이었고 나는 그들만을 위한 가장 열정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그들 덕분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애초에 나의 창작욕은 이렇게까지 즐겁게 펼쳐질 수 없었으리라.



#. 계속해보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며 매 학기 학비를 벌어야 했던 융을 보며. 언젠가 돈에 시간을 양보하지 않아도 될 시기가 오면. 그땐 꼭 하고 싶은 걸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요즘에서야 나는 융이 마음껏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행에 꽂혀있던 융은 일 년 전부터 디제잉을 배우고 있다. 그전에는 모션그래픽 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블루스 기타를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거의 일 년마다 바뀌는 그의 취미생활을 훤히 아는 친구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융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옆에서 듣고 있던 난 빵 터지고 말았다. 나이 서른다섯에 커서 뭐가 될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게 너무 웃겨서. 그러게 융은 커서 뭐가 될까?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분명 우린 아직 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자꾸 그 사실을 잊는 건 아닐까. 나는 이미 다 자랐다고. 살면서 어쩌면 대학에 가기 위해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결혼을 하기 위해 주어진 과업을 미션 클리어하듯 완수해내기 위해 진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하고 싶었던 것들은 계속 미룬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들이 일상 도처에 있는데도 애써 못 본 척하면서.


나는 우리의 미래가 궁금하다. 누군가가 보기엔 여전히 불안정한 삶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지금의 삶은 이십 대의 삶보다 안정적이다. 그 안정된 삶에서 그려보는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정한 이십대 때 그려보던 안정된 삶만큼이나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미래가 궁금한 사람과 사는 게 즐거울 수밖에. 사실 그가 뭐가 될지 내가 뭐가 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매일 조금씩 하고 싶은 걸 할 거다. 적어도 우린 이십 대 때보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조금은 더 알고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그 사실에 감사하며 기꺼이 즐겁게.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그래서 누군가 이렇게 살면서 대체 뭐가 되려고 그래? 라고 묻는 다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 계속해보겠습니다. 그것 만이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가 원하는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늙고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니까.



지난 가을 밤 신촌의 모 클럽에서 열린 융의 세번째 디제잉 공연. 늦은 새벽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내가 들어본 중 가장 흥겨운 믹스셋을 틀며 융은 즐거워했다.



'여행의 경험은 어떻게 일상에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키는가?' 에 대한 여행 탐구에세이. 3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받은 이 글들이「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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