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다리도 다리지만 날씨가 복병이다. 아이슬란드보다 한 술 더 뜬다는 이 나라 날씨는 익히 들어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초단위로 날씨가 변했다. 비는 그냥 기본 값이다. 졸졸졸 줄줄줄 콸콸콸- 모양만 달라질 뿐. 그러다 다시 해가 반짝. 먹구름이 몰려오다 활짝 개기를 수차례 반복. 사람으로 치면 정신분열이다.
왜 페로에 나무가 없는지 알겠다. 내가 나무라도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이다. 더 높이 자라지 못하는 키 작은 풀들의 심정도 알 것 같았다. 땅바닥은 이런 습한 기후에 맞게 이끼와 풀들이 무성히 자라나 스펀지처럼 폭신했다. 덕분에 다리는 많이 아프지 않았지만 트레킹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고 온 우리는 군데군데 파인 물웅덩이를 피해 가느라 땅만 보고 걸어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 걷다 보면 멋진 풍경은 볼 수가 없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동물들의 배설물만 잔뜩 보인다. 나는 똥밭을 걸으려고 그 먼 길을 온 건 가 싶어 우울해지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풍경에 감격스러워졌다. 나도 정신이 분열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여기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긴 한 걸까? 모진 날씨 때문인지 원래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융 말대로라면 여기가 유명한 트레킹 포인트라는데 두 시간을 걸어도 길 위에 아무 흔적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이름 없는 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 걸까? 살면서 내가 이름 없는 길을 걸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거의 모든 것에 이름이 붙어 있다. 살아있는 생명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나. 사람들은 이름 없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이름 없는 가수의 노래를 듣지 않는 것처럼 이름 없는 작가의 글을 읽지 않는 것처럼. 이름 없는 길을 걷는 나의 심정도 그랬다. 믿을 수가 없다. 자꾸 불안하다. 이 길이 진짜 맞는 길인가. 그동안 아무리 여행을 다녔어도 인터넷만 켜면 지도에 위치가 표시되고 길 이름이 나왔었는데 여기는 아니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름 없는 길 위에 서 있던 적이 없었다.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