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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Mar 05. 2016

나는 어떻게 서울의 장기체류자가 되었나

 살고 싶은 데서 살면 돼 _ 여행은 삶 #1

태국 산골에서 장장 다섯 달을 머물고 있을 때,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물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해요? 그동안 뭐했어요? 그럼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해요. 안 했어요. 그냥 나는 빈 종이 같은 시간이 필요했고 빠이는 그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일어나 밥 먹고 고양이들이랑 놀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해 좀 떨어지면 타운으로 슬슬 걸어 나가 놀다 들어오고. 그럼 사람들이 또 물었다. 안 심심해요? 네 안 심심해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날 보며 생각했다. (머무는 삶에서 배운 것/ 삶은 여행 #1 참고)  


아... 나는 집에 있는 걸 심심해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서울에선 종일 집에 있어본 적이 없어 미처 몰랐던 사실. 하늘과 나무를 볼 수 있는 풍경이 걸린 집에서라면 더더욱 심심해하지 않는다는 걸. 한 번도 도시를 떠나 본 적 없던 내가 태국 시골에서 산다는 건 이런 거였다. 일어나면 휴대폰보다 도마뱀을 더 자주 보게 되고 개와 고양이들이 침대 맡까지 디밀고 들어와 밥 달라고 조르고 초저녁만 되면 득실대는 날파리 떼와 씨름해야 하는 거.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자연에게 힘껏 위로받고 있었다. 손톱만 한 벌레만 봐도 질색하던 나는 손가락만 한 벌레를 봐도 점점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을 곁에 두는 데 거리낌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서울에서 처음 여기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세상에!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네?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이 만나는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네. 버스로 내려가면 서울의 중심과 지척이지만 가까운 역이 없어 유동인구는 많지 않은 곳. 귀기울이면 종일 새소리가 들리고 사방이 탁 트여 사계절이 담기는 풍경이 있는 마을. 본 순간 직감했다. 여기는 서울의 빠이구나.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면 나는 이 곳에 살아야 한다고.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엄마에게 말했다. 부암동으로 이사 가자고. 여행 다녀와서 남아있던 모든 돈을 이 집 전세금에 보탰다.


엄마, 우리 이사 가자 


이사 온 지 벌써 오 년째. 열 번 넘게 이사 다닌 내 서울살이 경력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동네가 바로 여기 부암동이다. 그렇다고 여기가 누구에게나 살기 좋은 곳은 아닐 거다. 겨울엔 도심보다 기온이 이삼 도씩 더 내려가 춥고 눈이 오면 경사길도 위험하다. 차가 있는 사람이라면 골목길이 좁아 운전하기도 불편할 테고 주차공간도 협소해 스트레스 받을 거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근처에 학교나 약국 병원 등과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불안할 수도 있고, 전철역을 선호하는 직장인이라면 가장 가까운 역까지 버스로 십 오분은 달려야 하는 이 동네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다.



그러나 부암동은 빠이와 많이 닮았다. 내가 살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꼬불꼬불 길을 지나 산 위에 형성된 마을이란 점, 사시사철 풍광을 즐기기에 좋고 동네를 아끼는 주민들의 마음이 골목골목 느껴진다는 점. 또 한가한 평일과 달리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주말의 모습까지. 나는 이곳을 마음대로 서울의 빠이로 명명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일상은 고요하고 단순하게 흘러가고 있다. 마치 빠이 숙소에 살고 있는 것처럼. 서울에선 도저히 못 살겠다며 박차고 떠났던 나는 돌아와 다시 서울의 장기체류자가 될 수 있었다.


여기는 빠이와 닮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난 다시 서울의 장기체류자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융이 물었다. 사람들은 이상해. 몇 억씩 대출받아 어렵게 집을 샀으면 그만큼 누려야 할 거 아냐. 집에서 편히 쉰다던가 하면서. 근데 왜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생활을 하는 걸까.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뭔가 이상한 물음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무리해서 고급 호텔을 숙소로 잡아 놓았는데, 여행 스케줄을 너무 빠듯하게 짜 놔서 새벽부터 일어나 조식 먹고 나가서 투어 마치고 밤늦게나 들어와 정작 숙소에선 잠만 자는 그런 삶 아닐까? 여행은 시간이 짧아서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삶에서의 집은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빚을 지고 산 집에서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야근하며 무리하게 일하다 훅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면 그건 좀 슬플 것 같다.


고급 호텔을 잡아 놓고 하루 종일 바깥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작 들어와선 잠만 자는 그런 여행 같은 삶


생각해 보면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일을 하는 직장과 생활을 하는 집이다. 그 두 가지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된다면 그 삶은 행복하기 힘들 거다. 특히 복잡한 도시에서의 집이란 여행지에서의 숙소만큼이나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평생을 살아갈 동네를 찾는다는 것 또한 비슷할 거다. 어떤 공간에서 가장 행복해지는지 여행의 경험을 통해 찾아보는 건 어떨까. 결국 내 삶은 일 년에 한 번 떠나는 휴가지가 아닌, 매일 출퇴근하며 지나치는 일상 속에 있는 거니까. 





3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받은 이 글들이「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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