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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꾸녕 Apr 20. 2024

내일 할 일을 미룰까 말까

생활이 흐른다

1.

새벽 산보를 했다.

지금 사는 동네는 적당히 걷기에 적당한 뒷산이 적당히 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볼 때 집보다 이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산 입구까지 가기 위한 발걸음이 너무 멀지 않은 거리.

라떼가 끝 똥까지 시원하게 배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산책 시간이 소요되는 코스.

시작과 끝을 다르게 정할 수 있는 다양한 길.

겨울에는 나무가 소리 좋게 바스러져있었고

봄이 되자마자 사람이 정비하지 않은 야생의 꽃들이 알아서 깨서 활동했으며,

여름 전인 지금은 부지런히 숱이 많은 초록 잎들이 그늘을 준비해 두었다.

맨발 걷기가 어른들 사이에서 유행인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어딘가에 두고

종아리를 걷어 부친 뒤 여기저기 조용히 지나가시는데 그분들로 인해 조용한 숲길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어스름한 저녁엔 뻐꾸기 같은 새가 일정하게 울어주고 비가 내리거나 습한 날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우렁차다.

가끔 이곳이 서울인지 쩌어기 어디 군 정도 되는 작은 도시인지 잘 모르겠다.


2.

매일 비슷한 루틴과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하루에 약 0.0027살씩 나이를 먹고 웬만해서는 세끼와 영양제 다섯 알 이하를 챙겨 먹으며 근육 운동을 하고 나서는 꼭 단백질이 21g 함유된 보조제를 섭취한다.

예전에 매일같이 하던 달리기를 요즘은 거의 하질 못해서 일일 만보를 걸으려고 결심했는데 일이 바쁜 날은 그냥 회사에만 있어도 만 보 이상을 걷는 날들이 있어서 조금은 허무하다.

조용한 집엔 늘 라떼가 발바닥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거나 코를 골며 자고 있고, 라떼 털 덕분에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하고 정리한다. 라떼는 나에게 산책과 청소라는 규칙을 선물해 주는 좋은 개다.


3.

맡은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완수하며 월 급여를 받고, 하루를 정해진 필수 루틴 및 필요 일과를 수행하며 시작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계절이 바뀌어 있다.

生活 생활. 낳아져서 살다.

 생각해 보면 생활이라는 단어는 삶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치열한 단어이다.

하루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서 또 비슷한 내일을 맞이할 예정이지만 오늘을 치열하게 보냈기 때문에 별 다른 일 없이 비슷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기 싫으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는 말일까.


요즘 어떠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는데 데일리 계획이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날에는 결국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었기 때문에 내일을 걱정하며 내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괜찮다.


4.

생활에 적당한 여유와 적당한 채찍질의 균형이 필요하다.

여유보다 채찍질이 부족할 것 같지만 채찍질은 꾸준히 비슷한 강도로 하다 보면 더 강해지고 잦아지는 중독성이 있다.

스스로를 채찍에 길들이다 보면 심지어 나중에는 여유조차 "여유를 누려야 한다"와 같은 강박이 생겨서 여유를 가지라고 채찍질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 열심히 채찍을 휘두르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채찍을 집어던지는 날들도 분명히 필요하다.

나는 정말로 그렇다.

그래서 오늘의 채찍을 집어던지고 오랜만에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

좋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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