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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HONG May 26. 2024

내 글이 어려운가요

표현과 언어의 격/ 브런치 접근법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주변에서 글이 어렵다는 반응이 있어서(?) 잠깐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마치 바둑에서 수를 계산하듯 글에도 몇 수를 내다보고 어휘와 행간을 배치할 텐데, 저는 몇 단계의 대화를 건너뛴 구조를 좋아합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예를 들자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대사를 기억하실 겁니다.

영화는 범인 잡기 위해 영화의 9할을 몰아치는 긴장감으로 달려가지요. 막상 살인자를 잡기 위해 그 지독한 시간을 보낸 형사는 연쇄살인마의 실체 앞에서 억장이 무너질 듯 할텐데, a4 용지 4천 박스 분량은 나올법한 감정의 대사는 하지 않아요. 몰아치는 감정에 오히려 정신줄을 놓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러면서 차마 '너도 사람이냐?' 싶은 표정으로 학교 선배가 후배 걱정하듯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을 합니다.

정작 고구마 10개는 관객이 먹고. 그 영화는 뜻하지 않은 이유로 관람 후 그 말이 회자됩니다. 왜 그 말을 했을까~로. 누구 말에 의하면 송강호의 애드리브였다는 말도 있는데, 그 상황에 나였더라도 무슨 말을 했을지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런 축약된 언어적 묘미를 저 역시 추구합니다.



영화 <마더>에서

엄마(마더)인 김혜자의 대사도 그래요. 자신의 아들 대신 누명을 쓴 피의자가 있는 교도소로 찾아가 "너는 엄마 없어?"라고 하죠. 그 부분에서 저는 오열했습니다.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내 나이가 몇 개 인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굳이 민폐를 일으키며, 고개를 의자 밑으로 처박고 엉엉 울었습니다.

분명 태어났을 때는 어미로부터 태어났을 텐데, 아니 생물학적으로도 여자(어미)의 몸에서 분명 저 아들도 한 자식으로 태어난 게 맞을텐데 엄마가 없다니?! 없다니요?!...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몰아쳐와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 누구의 자식은 엄마도 없이 교도소에 누명을 쓰고 저러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엄마로 각인된 배우 김혜자의 입에서 "너는 엄마 없어?"라고 되묻는 말이 너무 아픈 말 같았습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너무 대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살인을 저지르는 자식을 무죄로 만들 수도 있는, 사법부를 초월한 절대권력이고 또한 모성을 근거한 '어미‘로서 새끼에 대한 최후의 보루, 보호막인데.... 말입니다.


뭔가 드라마 작가 김수현의 글처럼 문장을 수도 없이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배수아 소설 <일요일 스키야끼 식당>에서 처럼 오밀조밀한 인간군상들을 표현할 때 혹은 다자이 오사무의 일부 글에서 적절한 인물을 묘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특유의 맛과 메타포가 다르듯 다른 의미의 '언어의 격'으로 사용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제가 쓰는 지금의 글들은 그저 감각을 놓지 않기 위한 몸풀기, 그림에선 크로키와 같은 어떤 행위입니다. 또한 과감하게는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습관을 오랜 시간 해온 터라 더 그럴 수도 있겠으나, 구체적으로는 즐거움이 뭐든 노동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항상 즐겁고 설레어야 합니다.
일이든 취미든, 내가 선택한 것들이


저는 본업이 있고,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쉬어야 다음 일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한데 추가적 일을 받으면 즐거울 수 없어요. 하다못해 수정사항을 요구하는 업체를 웃으며 대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것이 돈을 주고 저에게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에티튜드라고 생각합니다. 돈의 가치로서 일은 항상 즐겁고 설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상태가 준비되어야 함을 전제합니다.

즐겁지 않다고 느낄 때 모든 고통과 노동이 시작됨을 저는 알기 때문에 그런 순간까지 가게 하는 것은 경험을 무시하는 실수이고, 반복적인 실수는 실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그 '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여러 번 수정하고 생각하고를 반복합니다. 그것에 때로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거나 정작 내가 쉬어줘야 할 때와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를 놓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10분 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쓰기의 주제와 연상 그리고 내가 선택할 어휘와 문장, 글에서 느껴지는 어조(톤 tone)를 빠르게 쓰면서 결정하고 쓰면서 배치합니다. 그리고 노동으로 가기 전에 닫습니다.

발상에서 창작된 신선한 문장을 가두기 위함입니다.


글을 잘 쓰고 못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을 잡고 살을 붙이고 명암을 넣고 색을 입히듯 그렇게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의 글에는 청각과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본업이 디자인인 탓에 시각적 현혹도 있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과연 표현은 할 수 있을지~스스로를 겸손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지에 대해 더 고민하고 절제되어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뜻입니다.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면 또 그래야 하고요. 배설같은 글은 핸드폰 메모장에 나만 보는 글로 남기는 것이 마땅하고요. 사실 그런 글은 타인의 글쓰기에서도 읽고 싶지 않습니다.  



또각또각 발소리를 글에도 입히듯 ~.  그렇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남자친구를 통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내 자국 소리에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표현해 준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근무시간에 남자친구의 전화를 밖에 나가서 받아야 했을 때, 계단을 내려가면서 들리는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오랜만에 통화하는 남자친구에겐 심장소리처럼 설레었겠지요. 그런 미묘함을 응축된 청각의 글로 표현할 때 독자가 설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욕심일까요? (씌잌)


또한 때로는 사군자의 기백과 수묵화의 묵직함을 가진 광폭의 횡포로 문장을 써 내려갔으면 좋겠어요. 느끼는 사람들은 있겠지요~  무릎을 탁~! 치는 발상의 탁월함이라던지~. 문장을 갖고 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종이 안에서 만큼은 이 작가는 표현하고 있다던지...


그런데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ㅋㅋㅋ (씌잌)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한병철<피로사회>


꺼내 읽을 때마다 기록한 흔적







왜냐고요?
일요일 오전 7시 시간을 <브런치>에
글 쓰는 시간으로 소모할 순 없지요~  
너무나 고팠던 ‘읽기', 독서의 순간인데,
일주일에 한번 오는 일요일 오전7시!



약 빨도 없는 이런 글을 쓰면서, 귀한 촉촉한 시간을 날려버릴까 봐 저는 그것이 더 조바심 납니다. 일요일 오전 7시는 일주일만에 1번 옵니다. 희소성도 높고요.


저의 루틴은 보통 아침에 출근하여 30분간은 시를 읽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러지를 못했어요. 바쁘다기보다 개인적으로 도전한 국가시험을 4개월 정도 준비하다 보니 바뀐 루틴이 그랬어요. 시험이 끝나길 기다린 너무 그립고 고팠던 '읽기'의 독서의 순간입니다.  


오전 6시에 깨서 7시쯤 짐을 챙겨서 집 앞 무인카페에 와서 시를 읽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 모릅니다. 아침이슬이 촉촉한 거리를 걸어와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보내는 시간, 꿀맛 입니다. 또한 자꾸만 꺼내 읽게 되는 책을 곁에 두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시집이고요, 하나는 읽을수록 맛있는데 읽고 나면 까먹어서 다시 읽게 되는 철학 책입니다. 특히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갖게 하는 책입니다. 굳이 반론을 들자면 거래(돈)의 행위로써 제공해야 하는 노동일 때야 착취로 느껴지지만,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서도 아닌 좋아서 하는 것은 '착취'라고 볼 수 없지 않나~고 말하고 싶네요. 아무튼 철학도 참 맛있게 읽힐 일요일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제 글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1.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2. 글의 함의/ 함축의 건너뛰기 폭이 크다

3.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거나/ 문장이 어렵다

4. 어느 타이밍에 웃으면 되냐 등


독자들이 읽기가 어렵다고 느낀다는 것은 제품에 대한 사용후기 와도 같은 것이니 사용감을 좋게 만들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부드럽게 손에 잡히길 바란다’ 혹은 ‘목넘김이 좋은 글처럼 술술 읽기힐 바란다’의 뜻도 포함된 것 같고요. 하다 못해 리포트 써도 구조적인 형태로서 서론- 본론 - 결론과 설득을 위한 자료,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들을 정리하여 주제를 이끌어 내는데 말입니다. 그렇죠?  아쉬움을 공감 합니다.


저의 글이 읽기 어렵다는 얘길에 대해 아마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는 수월하게 읽기 위해 보다 친절하게 서술해 줄 필요가 있으며 혹시라도 그것이 에세이 혹은 산문이라면 더욱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해 주길 바랄 수도 있다는 것을요.



저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온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 글을 쓰러 왔다는 고정된 생각을 하실까요?


글쓰기는 다들 그러하시겠지만, <브런치>가 플랫폼으로 론칭되기 이전에 내가 먼저 해온 치유와 즐거움의 행위입니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제겐 글 쓰는 행위가 아닌 독자를 만나는 행위로써 <브런치>에 거는 기대와 저의 글쓰기의 변화를 위함일 수 있습니다. 쓰면서의 자기만족의 범주를 벗어나 다음 단계로의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진화를 해야 할 단계, 옵션을 더 정착해야할 단계. 그리고 시간이 해결해 줄 몫이 아닌 제가 해결해야 할 몫인 것도요.


더 고민하겠습니다. <브런치>플랫폼을 어떻게 활용하여 정작 중요한 내가 어떻게 더 성장하게 될지를 .








** 저는 완성된 글을 올리는 게 아니라 러프하게 쓰고 수정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 2024년 5월 26일 am7시 40분~am 11시 업로드

*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더 줄일게요.

* 본문에 (나) , (저)에 대한 혼용이 있는데 굳이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벌써 11시 40분이 넘었어요. 일요일의 반을 썼습니다.ㅠ 그게 암울합니다.

** 내일이 월요일 이므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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