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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재 Oct 23. 2021

7번 국도에서 일주일 간 지낸 후기

글은 빨래이자 설거지이다 밀리면 끝도 없다

7번 국도에서 지낸 지 6일 째 되는 날이다. 꽤 많은 일이 있었다. 매일 매일 밀리지 않고 적었다면 짧고 간명하게 매일을 기록했겠지만 한 번 밀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도 없다. 이쯤에서 이 여정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정돈해보고자 한다. 급작스럽게 손님이 들이닥쳐 밀린 설거지를 부리나케 하는 마음으로.




'21.10.16.토 1일 차 : 강원 고성 명파해변

용인에서 유튜브 촬영이 있었다. <내가 유디티가 된 이유> 책 홍보 관련 인터뷰 영상이었다. 일정을 마치니 저녁 여섯시 삼십 분. 해는 이미 기울었다.


카카오 맵을 켜고 동해바다 최북단의 어느 지점을 아무렇게나 골랐다. 어쩌면 거기가 dmz 구역 안일지도 몰랐다. 지도 어플에 상세 지도가 나오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일단 나에게는 출발 자체가 의미있었다. 시동을 걸고 도로 위로 나와 나의 차를 올려놓지 않으면 걱정과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한없이 퍼져나갈 것이었다.


네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오면서 진부령 고개를 넘는데 멀미가 날 정도로 굽이졌던 게 생생하다. 오래된 내 차의 전조등은 도로를 밝히기에는 너무나 어두웠다. 하이빔을 눈치껏 켜고 끄기를 반복하며 가까스로 도착한 명파해변.


명파해변 오토캠핑장


밤바다를 목도하고서야 내가 이 길에 오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하나로 내 안의 걱정과 두려움은 모조리 부서졌다.


텐트를 치는데 바람이 태풍 불듯이 거셌다. 지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원격으로 땅콩 스톱퍼 사용법을 교육받았다. 바람에 날아가려는 3인용 텐트를 온몸으로 움켜쥐고 붙들며 겨우 겨우 고정했다. 텐트 하나 치는데 낑낑거리며 한 시간을 소모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버려 식사는 걸렀다. 해변을 거닐며 파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21.10.17.일. 2일 차 : 고성 거진 앞바다

차에 짐을 싣고 동해바다 7번 국도를 따라 조금씩 내려왔다. 텐트 칠 곳을 찾아 헤맸다. 조건은 화장실이 있고, 바다가 보이며,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금방 찾았다. 고성 거진 앞바다 해맞이 쉼터.


텐트를 치고 의자를 펴서 책을 읽었다. 배가 고파서 라면 하나를 끓였다. 책을 다시 잡았는데 잘 읽히지 않았다. 몇 년을 읽지 않고 지냈는데 금세 잘 읽힐 리가 없었다.


괜히 심심해져서 빈둥거리다 준비해 온 현수막을 하나 걸었다.


<내가 유디티가 된 이유>, 내 책 표지를 확대 출력한 현수막을 정자에 걸었다. 일명 저자와의 만남. 지나가는 차들마다 내 현수막을 보고 저거 참 또라이다 생각할 거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두 끼를 내리 라면을 먹었다. 라면과 라면 사이에 꾸역꾸역 책을 붙들었다. 해가 있을 때는 종이책을 펼쳤고 해가 떨어졌을 땐 전자책을 펼쳤다. 양쪽 다 잘 읽히지 않았다. 까막눈이 된 기분이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집중력. 그것이 철학과를 중퇴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유디티를 전역하고 한 권의 책을 스스로 출판한 지금 나의 현 주소였다.


자고 일어나니 눈두덩이 몹시 부어있다. 잠자리가 적응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부실하고 나트륨만 가득한 라면 위주의 식사가 문제인 것인지. 확실히 육체 건강에 좋지는 않은 여정이다. 정신 건강이라도 좋으려면 열심히 읽어야 한다.




21. 10. 18. 월. 3일 차 : 천진 해변에 잠시 머물다 속초 H집.

천진 해변에서 텐트를 치고 앉았다. 생각보다 텐트를 칠 곳은 많지 않다. 사람들이 쉴 만한 곳을 피해야 하고, 화장실이 있어야 하며, 한적한 곳이어야 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찾은 천진 해변. 날이 갑자기 뜨거워졌고 그늘 하나 없는 양지바른 곳에 설치한 텐트 내에서 복사열이 뜨거웠다.


예전 영화 사업할 때 알고 지내던 K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부산에서 있을 독립영화 촬영 제작부에 합류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얼마간의 급여가 있고, 꿈꾸는 영화 제작 현장을 체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부산에서 이루어지기에 이 7번 국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바로 일정을 앞당겨 처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속초에 머무르기로 한 일정을 하루 앞당겨서 속초 H 집으로 향했다.


유디티 선배였던 그는 나보다 5살이 어리다. 현역 때부터 형님 형님 하면서 살갑게 대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파병지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갈매기의 꿈과 신해철을 소개해주었고, 그는 그 둘을 모두 좋아했다. 선배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숙소 복도에 의자를 깔고 앉아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 사람들은 그가 반쯤 미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모자 뒤에 매직으로 '바 람' 두 글자를 새겨놓고 살았다. 진해가 고향이던 그는 나보다 석 달 먼저 전역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한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닭강정 집에서 닭을 튀겼다. 녹록치 않은 도회지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속초에 집을 구헀다. 장기를 살려 스쿠버 샵에 취직했고, 샵에 딸려있는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을 하기도 한다. 전역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내게 그는 잊고 있던 나의 어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그가 영원히 바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을 내 책의 맨 앞장에 적어 그에게 주었다. 그는 내 책을 읽고 한참을 오열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큰 영감을 전해준 내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고통 속에서 건져올린 이야기였기에 그에게 감명을 전해줄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의 집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오랜만에 씻고,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그의 다음 행보는 서점에서 오래 일하며 원없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전 세계를 유랑하고 싶단다. 그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몇 안 되는 책들의 이름이 아른거린다. 그리스인 조르바, 데미안, 나는 7년 동안 세계 최고를 만났다, 갈매기의 꿈, 신해철. 그의 마음 속에 읽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게 된 데 내가 한 숟갈 도움을 얹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기뻤다.




21.10.19.화. 4일 차 : 속초에서 포항까지

오전에 udt 지망생인 H의 후배를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했다. 어렸을 때부터 갖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의 정신이 온전히 버텨주길 바라며 책 앞장에 정성껏 사인을 해주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7번 국도에 차를 올렸다. 한 200킬로 쯤 왔을까, 제작부 쪽에서 나의 운전 면허를 묻는다. 1종 보통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통보한다. 2종 보통으로는 탑차나 스타렉스를 운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내부 커뮤니케이션 오류로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기름값만 날리고 괜히 헛걸음 한 셈이 되었다. 그쪽에서는 연신 죄송하단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언짢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 국도 위에 있었다. 어차피 정처없는 이 여정,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어느 곳에 짐을 풀고 누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여행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부 참여 제안에 즉시 응답할 수 있었고, 어긋나버린 계획 또한 불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화 제작부 참여 전 부산에서 보려고 했던 여자친구를 포항으로 불러 만났다. 이곳에서의 모든 삶이 만족스럽다. 특히나 나 자신의 정처 없는 정체성이 가장 만족스럽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여자친구를 떠올릴 때는 가족같은 마음이 들어 여러 생각에 잠긴다. 그 생각 중 대부분은 미안함이다. 얼른 1인분을 넘어서 100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겠다는 다짐밖에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조바심이 나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잠재우기 바쁘다.


포항에 들른 김에 '달팽이 책방'에서 내 책의 안부를 묻는다. 서점 사장님께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작가라고 하니 밀크티를 대접해주셨다. 타이틀 하나로 대우가 달라지는 기분이 묘했다.


영일대 해수욕장의 밤바다를 여자친구와 거닐었다. 그곳에서 먹은 식대는 유독 비쌌다. 맛과 양에 비해서 영 터무니없었다.




21.10.20.수. 5일 차 : 영덕 강구항, 하저리 해수욕장

여자친구와 식사를 하고, 내려보냈다. 차를 몰아 다시 갈 길을 간다. 사람이 다녀간 자리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감돈다.


영덕 강구항에 차를 대 놓고 아무거나 집히는 책을 든다. 최지욱 작가의 '이건 그릴 수 없겠지'. 담배에 대한 애착이 인상깊었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평범한 소재를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작가의 내공이 놀라웠다. 최진석 교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다가 충격을 받고 덩달아 큰 위로를 얻었다. 책 속의 문장을 옮겨 추후 완결된 글을 적고자 마음먹었다.


풍경이 지루하고 답답하여 차를 조금 더 움직여 영덕 하저리 해수욕장에 왔다. 엠프를 설치하여 김범수 - 처음 느낌 그대로를 불렀다. 추위 때문이었는지 엠프의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어 완성되지 못한 노래를 인스타에 업로드했다. 이 길 위에서 100권의 책을 읽고, 여러 편의 글을 씀과 동시에 나의 노래 또한 성장하길 원한다.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노랫말로 내뱉을 수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늘 상상한다.


윤동주의 시집을 읽다 밀린 메모를 정리했다.


 


21.10.21.목. 6일 차 : 울진 어딘가, 삼척 증산 해변

하저리 해수욕장에서 일어난 시각은 오전 열 시 반 정도. 잠을 생각보다 오래 잔다. 개운하지 못하다. 체력이 예전만 못함을 느낀다.


울진 어딘가에서 발전기를 돌려 엠프와 노트북을 충전했으나 노래가 맘처럼 쉽게 나오지 않아서 금방 접었다.


동해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는 모 선배와의 약속을 확정했다. 동해와 삼척의 경계 즈음에 자리잡은 증산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기로 한다. 삼척에 들른 김에 배가 고파 시장에서 닭강정을 먹었고, 배가 차지 않아 어시장에서 멍게를 포장해 소주를 마셨다. 부슬비를 맞으며 먹는 멍게가 또 은근히 맛이 났다.


세상이 고요해서 책이 오랜만에 잘 읽혔다. 채사장이라는 작가의 열한 계단을 아이패드로 읽었다. 진리를 찾아나가던 그의 젊은 날의 여정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불현듯 동해바다에서 기거하게 된 그의 스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려 반드시 정자 밑에 텐트를 쳐야 했는데 바로 옆에 차박하려는 자들이 깨어있어서 기다렸다. 그들이 잠든 후 텐트를 쳤다.


어쩌면 이 여정에서 나는 무언가에 중독된 채로 살아온 나의 삶을 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코올, 니코틴, 섹스 따위의 것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중독 혹은 무언가에 대한 강박까지도 일종의 소프트 어딕션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 속에서, 안락한 집 침대 위에 누워서 그것들을 끊어낼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곳에서도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그러나 점차 마음 속 어느 부분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나의 잠자리, 나의 풍경, 나의 처지는 지금과 달랐다. 그런데 이 여정에 올라선 지 일주일 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를 중독되게 하는 것들은 어쩌면 발디디고 있던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내 영혼의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밀린 기록을 적었다. 뱉어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밀린 여행의 시계를 원위치시켰다.


다음 글부터는 타임라인 형식으로 일과를 단순 나열하는 글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느낀점에 대해서 적을 생각이다.


바로 그걸 하고자 나는 이곳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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