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지재 Nov 08. 2021

앙꼬스러움에 대한 부연

앙꼬는 자신의 발톱을 누릴 자격이 있다.

오랜만에 깊고 저조한 우울감을 맛본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마음의 주파수는 바로 지금 이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밝고 명랑한 상태에 한 스푼의 우울감을 얹은. 지금껏 많은 날을 웃으며, 에너지 넘치는 ‘시늉’을 하며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어찌 삶이 밝고 맑기만 하겠는가. 그러한 내 안의 일부분을 인정하고 세상에 드러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안의 어떤 퀴퀴한 부분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앙꼬스러움이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겠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따라간다고 하는 말처럼 나는 나의 현 상태의 점검을, 지금으로서는 내가 써 내려간 글에 의거하고 있다. 깊은 우울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때 이른 쓸쓸함에 시달리다 불현듯, 내 책의 프롤로그에서 발톱을 감추려 애썼던 앙꼬가 생각났다.


꽤 많은 나날을 승승장구하며 살아왔다. 노력에 의한 것이기도 했겠지만은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들이 많았다. 물질의 부족과 관계없이 나 자신의 삶의 모양새에는 부족한 게 없었고, 그리하여 열등감과 결핍감도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삶이 디폴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잘난 이들에게는 우스운 정도로 미천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내가 겪어온 삶의 토양에서 나와 같은 인간이 자라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그 토양에서 나고 자란 모든 것은 죽거나 다쳤다.


스스로를 돌연변이라 여기게 된 날이 아직 생생하다. 알코올과 폭력으로 얼룩진 아버지, 삶의 무게를 고통스러워하는 누나, 정신의 병을 얻어 개명한 형, 그리고 그 모든 삶 또한 자신의 숙명이겠거니 하며 모든 걸 홀로 떠안고 살아가던 어머니. 한 번은 누나가 어머니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잔뜩 내뱉고 방문을 쾅 닫고 거리로 나섰을 때 어머니와 나 단 둘만 집에 혼자 남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와 서로 마주 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이제 정신이 온전한 것은 너와 나밖에는 없구나…”


엇나가는 주변의 상황과, 그와는 별개로 너무나 완벽한 삶을 구축하던 내 생활의 면모가 비교되기 시작한 첫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도대체 나는 왜, 왜 나만 이렇게 잘 되어가는 것이지. 모두가 아파하는데 나는 어째서 행복한 것이지. 그때부터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행복을,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찬란한 것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나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임을 남들보다 조금 빨리 깨달은 까닭이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듯이 겉보기에는 시궁창 같은 삶일지라도 그 안에 숨겨진 보석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라 여겼다. 쉽지 않았다.


나를 더럽히고, 파괴하려던 모든 시도들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쉽게 더러워지지도, 쉽게 박살 나지도 않은 질긴 영혼의 생명력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을 바꾸자. 나의 재능이 발톱처럼 그대들을 할퀼 수 있으나, 비교하게 하고 패배감을 느끼게 하고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얻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게 하자. 저들 또한 저 나름의 발톱을 지녔음을 깨닫도록, 그리하여 저들이 나의 발톱 또한 견뎌낼 만큼 성숙하고 행복해지도록,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으나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도 있음을 깨닫도록 기꺼이 도와주자. 모두가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사실은 너무나 외로웠던 나머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어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그러한 흐름을 타고 오늘의 나 자신까지 흘러왔다.


이제는 나를 이해하겠거니 생각했던 이들에게 또한 많은 상처를 안겼다. 나의 발톱을 사랑하던 이가 있었던 반면, 그가 나의 발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처 입고 떠나간 이도 있었다. 발톱이 아니라 꾹꾹이일 거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발톱이라 떠나간 이도 있었다. 모든 이별이 두렵지는 않다.(라고 쓰면서 나는 아직도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나일뿐이었다. 발톱을 깎아낼 방법을 몰라 아스팔트 맨바닥에 있는 힘껏 비비며 자해해봐도 상처 입고 떨어져 나간 그 자리에 발톱은 다시 자라났다. 지나온 모든 순간마다 나는 그저 나였을 뿐이었다. 상처 받고 떠나간 이들은 그들이다. 두 사건은 독립 사건이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독립 사건은 독립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종속되어있기도 하다. 나는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가 슬프다. 그리고 상처 입은 채로 세상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그들의 삶에 연민을 느낀 채 산다. 그래서 아프다.


긴 우울의 터널을 지나며, 앙꼬에게 전했던 그 말을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어본다. “나의 발톱은 너를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난 그저 이렇게 태어났을 뿐인 걸.” 책의 한 구절로 이러한 문장을 삽입하는 것은 상당히 쉬운 일이다. 어려운 것은 이 문장을 사는 일이다. 나는 내가 겪는 고립감, 외로움, 쓸쓸함 따위의 모든 정서적 어려움은 대부분 나의 앙꼬스러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그때 그 문장을 앙꼬에게 들려줄 때 이렇게 마저 얘기할 걸 그랬다. “앙꼬야, 너는 너의 발톱을 누릴 자격이 있어.”라고. 그것이 타인을 아프게 하더라도, 누군가를 상처 입고 떠나게 하더라도, 내가 그 순간에 진실된 마음이었다면 죄인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오해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젠가 서로의 발톱이 남기는 생채기마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단단해지는 날에는 다시 만나 꾹꾹이를 눌러주기도 하리라 여겨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발톱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떠나간 모든 이들이 단단해져서 돌아올 날까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보다도 나 자신을 사랑할 권리가, 어쩌면 의무에 수렴할 만큼이나 우세해야만 한다.


작가의 이전글 7번 국도에서 일주일 간 지낸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