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지재 Jan 04. 2022

설악산 이야기 1 - 설악 3인조



이곳에 온 지 열흘 째. 근 10년 만에 제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것이 변해가고(혹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생활 패턴은,
- 1식 6찬이 딸려 나오는 훌륭한 3끼 식사.
- 오전 : 영화 2편 감상
- 오후 : 독서
- 저녁 : 독서, 운동, 아이디어 회의
- 핸드폰 꺼놓고 23-24시에만 잠시 확인

상당히 하드 합니다. 훈련소 느낌이죠.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함께하겠다고 기꺼이 찾아와 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게 감사를 넘어서 신비할 지경입니다.

처음에 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의 단초 정도를 이야기했고, 이들은 그 아이디어와 이면에 깔린 가치관에 동의했습니다. 우리의 이상을 어쩌면 아주 재미난 방식으로 실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겠지요.

변화는 행동에서 나오지만, 적어도 그에 앞서 고작 한두 달 일지라도 행동 없는 독서에만 몰두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이들을 이곳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곳에 모이게 됐습니다.

마음이 맞는 자들과 같은 미래를 꿈꾼다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하고, 나아가서는 ‘효율적’ 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혼자일 때보다 시너지가 엄청나더라고요.

삼천리를 걷고, UDT를 전역하고, 코로나로 무산된 꿈들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폭풍처럼 지내오면서 저는 슬픔 같은 감정을 잘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어떤 격정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건 제 책의 맨 앞 장에 적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행복감을 느끼니, 저에게 찾아온 또 다른 감정은 다름 아닌 ‘슬픔’이었습니다. 행복감에 비례하여 슬픔이 덩달아 살아나는 저의 내면을 포착했습니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지요. 내가 그간 슬픔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아서였구나, 멈춰버린 시계추처럼 그저 무뎌졌던 것이었구나, 하고요.

저는 인생의 why를 찾는 것이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삶의 의지와 욕망을 불어넣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why에 잠식됐던 것 같아요. 일상과 사람, 낭만과 재미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인데, 나아갈 길에만 몰두하면서 점차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건져낸 삶의 이유와 목적은 상당히 인간적인 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도요.

‘삶의 이유’라는 목적이 생겨버리면 목적과 관계없는 모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찍기 전부터 잠재적 이상이 연출가 안에 확고하게 존재하여 정신이 거기에 갇혀 버리면, 지향하는 뜻이 어떻든 간에 ‘조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앞에서 ‘열린 자신’으로 어떻게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과제입니다.’
…‘저는 의미라는 형태로 삶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이면에서 의미 있는 죽음,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사고방식이 나올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 의미를 묻기 전에 기분 좋게 살았다는 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자연과 접하며 생기 넘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사는 의미를 말해야 하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감독은 아래와 같은 문장을 연출노트에 적습니다.
…’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 … 영화가 그런 주장을 소리 높여하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풍성한 삶의 실감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

풍성한 삶의 현장에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것. 삶의 이유는 나중이라는 것. 결국 우리의 삶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의 축적이라는 것. 깊은 깨달음을 주는 관점이었습니다.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가 싶게 사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쨌든 지금 저는 삶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러한 만족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몰락해버린 설악산 상권에 감도는 황량한 분위기가 어느샌가 우리 사이에서도 감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2부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앙꼬스러움에 대한 부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