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흔한 남매들이 그렇듯 데면데면한 우리 사이에 전화라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오죽하면 내게 전화를 했을까 싶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누나, 공부가 참 쉽지 않다."
전화를 받자마자 던진 동생의 한마디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남들이 공부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꼬시다.'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내게 털어놓는게 안타까워서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오르지 않고,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 동생의 고민은 많은 수험생들이 떠안은 짐과 비슷했다. 이런 저런 고민을 이야기하는 동생에게 나는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아, 좀 못하면 어때? 괜찮아."
내 말에 잠시 멈칫한 동생은 "누나 공감능력 좋네."라며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동생의 목소리에 내 마음도 한결 나아졌다.
그러게, 나도 이런 말을 들으며 컸으면 참 좋았을 걸.
생각해보면 수험생 시절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못하면 어때?"였다.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수많은 시간들은 나를 성장시켰지만 또 하나의 결핍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공부를 엄청 잘하지도 못했고(항상 2%가 부족했음), 명문대에 입학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나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누구나 아는 기업에 취직했다. 수능을 망쳐서,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해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조금 못해도 괜찮았다. 조금 못하는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살아갈 동기부여가 되는 동시에 못해도 괜찮다는 위로가 되어주었다.
현재에도 결핍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잘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 자신에게 외친다. '좀 못 쓰면 어때?'
조금 못해도 괜찮다. 못한다는 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니까. 그렇기에 못하는 내가 꼴보기 싫을 때 '넌 왜 이렇게 생겨 먹은거니?'라는 자책은 멈추기로 했다. 대신 다정하게 보듬어주고 싶다. '그래, 조금 못해도 괜찮지. 앞으로 더 잘하면 되지'라고 말이다. 그렇게 내 안에 자리 잡은 결핍은 내가 채워주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