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소설: 인생은 나그넷길)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봄날, 백발의 할머니가 친정 오라버니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찬 기운이 살랑살랑 스며드는 주말 저녁나절이었다.
겉옷을 입자니 덥고, 벗자니 쌀쌀한—옷차림이 애매한 그런 봄날.
일주일 중 가장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천천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손가락은 느릿하게, 생각은 조용히 흘러갔다.
“아름다움은 여백 속에서 피어난다.”
그녀는 늘 그렇게 믿었다.
삶의 여유는 그녀에게, 마치 사막에서 우연히 만나는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그리움일까, 아니면 기다림일까.
사랑이라는 꽃은, 언제나 간절한 바람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들을 어떤 말로 옮겨야 할까.
생각이 그즈음 머물던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 마당에서 두세 명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순예 씨는 안방에 누워 쉬고 있었고, 남편은 고양이 밥을 챙기러 마당에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보, 여기 나와봐요!”
남편의 목소리가 불렀다.
순예 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섰다.
서산으로 기우는 햇살이 낯선 손님들의 등 뒤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백발의 할머니가 그녀를 보자마자 외쳤다.
“아이고, 형님!”
그러면서 손을 덥석 잡았다.
토방에 발을 내딛던 순예 씨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그 손을 마주 감쌌다.
휠체어를 밀고 온 젊은 남자가 설명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벼르던 마음 하나로 이 길을 찾아왔다고.
“친정 오라버니가 혹시 밥을 굶고 계실까 봐요. 그 생각만으로 왔어요.”
세 번째 사람은 인근에 사는 친척으로, 두 사람을 모시고 왔다고 덧붙였다.
할머니의 기억은 오락가락했다.
전깃불이 깜빡이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희미하게 떠오르고 흐려졌다.
“형님, 나 강채운이야!
어릴 적 오디 철 되면 오디 따먹으려고 나무에 올라갔잖아.
그때 형님이 콩꼬투리 떨어진다고 그렇게 야단쳤지!”
“형님은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며느리예유.”
“아, 며느리…”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오빠는 잘 지내고 계셔?”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지 오래됐쥬.”
짧고 뭉근한 침묵이 흘렀다.
순예 씨는 방 안으로 들어가 저녁을 권했지만, 할머니는 식사를 잘 못 하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대신, 방앗간에서 막 가져온 개떡거리 한 덩이와 두유 몇 개를 정성껏 챙겨 드렸다.
짧은 만남에 남은 아쉬움을, 그렇게 마음에 담아 건넸다.
채운 씨는 고왔던 어린 시절의 공기를,
그 시간 속의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미 하늘나라 시민이 된 친정 오라버니가
밥을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에,
그 긴 길을, 대전에서부터 따라 올라왔다.
순예 씨는 채운 씨를 배웅하며,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걸 느꼈다.
인생은 이렇게, 왔다가 가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삶의 크고 작은 파도들도—
하나씩 넘고 나니,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
휠체어는 천천히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순예 씨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당에 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작고 조용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오라버니 걱정은 이제 그만하세요.
이승에서는 다시 만나기 어려울지 몰라도,
천국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날의 여운은 오래도록 마당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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