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여름감기 같은 마음

학교 영양사의 여름, 그 설문지 앞에서

by 홍주빛

#삶이 글로 표현되는 순간-홍주빛
모든 아이를 만족시킬 순 없지만, 매일 마음을 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름감기 같은 마음

- 학교 영양사의 여름, 그 설문지 앞에서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겁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씨에, 냉방기와 실온을 오가다 보면 슬며시 찾아오는 여름 감기.
그저 몸살일 뿐인데도 유난히 서러울 때가 있어요.
아마, 감기보다 마음이 먼저 아팠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여름 감기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바로 학교에서 근무하는 영양사의 여름 감기예요.


작은 병원에서 일할 땐 없던 일이었지만, 학교에 오고 나서는 해마다 한두 번씩 ‘학교급식 인식도 조사’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학기마다 한 번씩 했는데, 다행히 최근에는 연 1회로 줄었어요.
설문 대상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까지 포함됩니다.
그 설문지가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되시나요?


6월 초가 되면 저는 설문 조사할 계획서를 작성하고, 조사지를 출력해 학년별로 나눕니다.

담임 선생님들 우편함에 넣고, 회의 시간에 협조를 부탁드리며 본격적인 시작이 되죠.
올해도 계획부터 결과를 받기까지 대략 일주일 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지를 '열어보는' 데에는 여러 날이 더 필요했어요.
매일 급식 준비로 분주했던 것도 맞지만,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났습니다.


또 어떤 말들이 적혀 있을까?
이번엔 급식 만족도가 얼마나 나왔을까?
불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설문지는 어느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몇 해 전, 설문지 속 한 문장이 제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영양사를 바꿔버리면 좋겠어요.”

이 글을 쓴 학생은 190cm가 넘는 건장한 남학생이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친밀하게 지냈고, 함께 영양 상담을 하며 체중 감량도 도왔던 친구였어요.
본인의 허락을 받고 키와 몸무게를 측정하며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한 문장 앞에서 저는 무너졌습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꽤 오래 앓았어요.
그 문장이 여름 감기처럼 제 마음을 앓게 했고,
그 기억은 매년 이맘때쯤 다시 떠오르곤 했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는 “급식이 너무 기름지다”며 가볍게 해 달라 하고,
또 누군가는 “고기를 더 주세요”라고 적었습니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말 옆에는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글도 있었죠.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모든 사람의 입맛과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꼈을 뿐이에요.

식당 입구에는 늘 작은 의견함과 메모지를 비치해 두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매일 보는 얼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짜 속마음은 설문지를 통해서야 가까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아침,

예배 후 시간을 빌려 식생활 교육의 연장선으로 학생들과 다시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소통의 방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요.

급식 만족도 설문조사는 매년 돌아오는,
영양사들의 작고 조용한 ‘시험’ 같습니다.

그 시험지를 앞에 두고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상처도 받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 어린 조언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회복해 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영양사의 여름감기를 이겨내는 과정 아닐까요.


끝으로, 저를 다시 일어서게 해 준
학생들의 소중한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요.

“맛있게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이 짧은 인사가,
매일 급식을 준비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걷게 합니다.


여름 감기는 결국,
그렇게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볼 이유가 되어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식사를 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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