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이한빛 PD를 추모하며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유서를 읽자마자 먹먹해졌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한 그는 지난해 10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거대 미디어 방송사 PD였다. 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고(故) 이한빛 PD의 페이스북엔 그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의 분노와 추모로 뒤덮였다.
55일간의 촬영 동안 단 이틀 휴식, 하루 평균 20시간의 살인적 업무 강도는 일상이었다. 업계 풍토로 여겨지는 권위적 조직문화는 오히려 버틸만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맡은 드라마 첫 방송 직전 해고된 계약직 스태프들에게 선지급된 돈도 직접 회수해야 했다. KTX승무원, 기륭전자 등 사회 곳곳의 약자들의 투쟁에 위로를 보태던 그였다. 본인이 혐오하던 노동현장의 부조리를 몸소 행하던 순간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지금까지 만들어 온 모든 삶을 스스로 파괴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 세상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에 숨이 막혔을 거다. 이건 자살이 아니다. 영민한 젊은이를 마지막 구석까지 내몬 사회적 타살이다.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 일이 원래 그래요"라는 집단도 있었다. 그 집단에 소속된 임용 2년 차의 젊은 검사도 마찬가지로 살인적 업무량과 상사의 폭언, 폭행에 노출돼 결국 세상을 등졌다. 한 부장검사의 일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만은 힘들다. 신입이나 후배라는 호칭 이전에 한 명의 노동자였던 한 인간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데 구조적 모순이 있다.
PD, 검사 등 도제식 교육이 최선이라 여겨지는 직업적 특수성이 가져온 참극이 아니다. '구로의 등대'라 불리며 밤늦게까지 직원들을 야근으로 내몰던 한 게임회사는 어떤가. 잦은 야근 행태가 비판을 받자 불을 끄고 블라인드를 내린 채 일을 하게 만든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비정상적 노동이 일상으로 고착화된 시스템이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 남들은 다 버티는데 왜 너는 버티지 못하냐고? 구조가 구조를 정당화할 순 없다.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시스템은 시스템 차원에서 손을 대야 바뀐다.
한 신입 PD의 죽음에 분노하는 20~30대가 많은 이유는 그의 삶과 내 삶이 다르지 않다는 공감에서 비롯한다. 회사에서 기계 부품처럼 쓰이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 끝나지 않는 노동과 오지 않는 퇴근, 대학 시절에 꿈꾸던 취업 후의 삶이 맞는지에 대한 혼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취업자 연간 노동시간이 두번째(2113시간)로 많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공통된 갈증이다.
박차고 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청년 실업률 12.5%의 취업전쟁을 벌이는 이들에게 취업 후 '노동착취'는 거부할 수 없는 당위가 된다. 착취가 성취로 뒤바뀐 노동 현장에서의 미덕이 정말로 참고 버텨서 밥벌이를 지키는 것일까.
유서 말미 내용이 아른거린다. "지금 그만두면 패배자이자 중도포기자 낙인이 찍힌다는 두려움에 밖으로 한걸음 내딛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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