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abella Hong 작가 Jul 05. 2020

겨울의 역설

바람 소리가 창문가에서 웽웽 맴도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전 5시 38분. 

평소라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새벽 산책을 나갔을 테지만,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며 천천히 찻물을 내렸다. 아침 햇살이 한 템포 늦게 찾아올 때 나가기로 한다. 

따뜻한 물속에서 녹차 잎들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모양을 찬찬히 바라보자니 내 몸마저 덩달아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찻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다섯 살 어린 딸이 잠을 깼다. 


“엄마 뭐해요?”

“응. 산책 가려고 준비 중이야.”

“나도 갈래!”


작은 아이가 운동화를 챙겨 신고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10분가량을 더 걸어 작은 숲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섰다. 옆에 선 아이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소리를 낸다. 그 깔깔거리는 웃음 속으로 입김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모양을 바라보다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던 밤 산책이 떠올랐다. 

어둑어둑하고 찬 바람이 불던 저녁이었다.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걷다 보면 우리는 늘 골목길 끝 작은 슈퍼마켓에 다다랐다. 

어린 내가 발 뒤꿈치를 한껏 치켜세워야만 살짝 모습을 보여주던 큰 원통 안 뽀오얀 눈 같은 그것. 

할아버지는 어린 산책 동무에게 호빵을 사주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한 입 가득 달짝지근한 팥을 물고 선 그제야 한 김 식혀보려 호호 연신 입김을 내뱉었었지.

아이의 숨결에서도 그 달콤한 팥 향이 나는 것만 같다. 


한참을 걷다 보니 늘 다니던 숲길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나뭇잎들과 마른 가지들이 사람들의 발자취를 가려놓아 조금 낯설게도 보인다. 

신이 난 아이가 이리저리 뛰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런 아이를 따라 나도 힘차게 나뭇가지들을 밟아 소리를 내 본다. 

조금 경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그 놀이에 빠져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 코 앞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엄마, 손이 너무 시려.”

“그래. 너 손이 빨갛다.”

“내 주머니는 너무 작아서 손이 다 안 들어가. 이것 봐봐.”

주머니에서 샐쭉 이 삐져나온 손가락들이 과장되게 꿈틀거린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자 아이가 손을 냉큼 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렇게!”

“음.. 그럼 엄마는 어디에 손을 넣어야 해?”

그러자 딸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엄마는 어른인데도 추워?”

“그럼, 엄마도 춥지. 겨울은 공평해서 모두에게 똑같은 추위를 나누어 주거든.”


그러자 아이가 멈춰 서서 잠시 생각을 했다.


“어쩌지? 내 주머니는 너무 작은데.. 엄마 손은 이 만큼 크잖아,,”


나는 아이의 손을 맞잡아 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렇게 함께 손을 잡고 주머니에 넣는 거야. 어때? 더 따뜻하지?"


그제야 만족한 듯 환히 웃는 아이의 모습에 나도 한결 마음이 포근해졌다.

겨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다. 

그리고 작은 호주머니 속 너와 나의 맞잡은 두 손이다. 

이 시리도록 매서운 겨울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얼리고 멀어지게 할 것만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고마운 계절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온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시간들. 이 겨울만큼 역설적인 계절이 또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