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유 없이 떠나지 않는다. 물을 담고 있던 댐이 무너져 거대한 물 덩어리가 쏟아져 해방되는 순간이 있다. 인간이 만든 댐이 무너져야 물은 비로소 본연의 모습으로 흘러간다. 사나이의 삶에서 그가 쌓아 올렸던 부자연스러운, 본질과 거리가 먼, 껍데기 같은 댐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다. 깊은 고통과 고뇌의 순간이 마침내 그의 댐을 무너뜨려 그의 정신을 해방시켰고 그는 맨몸으로 광야로 떠났다.
불덩어리 같은 가슴을 안고 광야로 떠난 사나이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뜨거운 태양만이 작열하는 그곳에서, 바람 한 자락 불지 않는 그곳에서 구원을 찾거나 아니면 그냥 죽기를 바랐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그곳 광야에서 그는 걷고 또 걸었다. 태양은 마치 하늘 어딘가에 턱 하니 걸려버린 것처럼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는 극도의 탈진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이토록 나약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만 걷고 싶었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었다. 다시 또 한 걸음.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걸음을 이어가자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침묵과 열기만이 가득 찬 그곳에서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죽음은 그토록 삶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해는 뜨고 지고, 사나이의 시야에 펼쳐진 풍경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평생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장소를 그는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곳, 광야에도 작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물이 있다. 생명의 기원이며 생명 그 자체를 그가 들이켰다. 그 흙탕물이 말라서 갈라진 그의 점막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물이 그의 가슴에 뚫린 공허한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광야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가 성장하면서 겼었던 온갖 어둠과 고통, 외로움과 절망들이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르기 위한 필연이었음을, 앞으로 그가 살아내야 할 삶과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이 이곳에 와야 했음을 깨달았다. 뜨겁게 달구어진 사막과 작은 오아시스 사이에서 뼈와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남자에게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야, 너 아빠 아들 아니라며! 이 애비 없는 자식이 까불고 있어!”
"아니야 나 아빠 아들 맞아!" 아이가 맞받아쳤다.
"웃기고 있네. 니 엄마가 처녀 때 애를 배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을 때, 니 아빠가 살려준 거잖아. 이 쪼다 자식아."
머리 하나는 큰 아이들의 모욕을 듣고 아이는 화가 나 달려들었으나 힘이 센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을 뿐이었다. 무분별한 폭력은 어디에나 있었다. 아이는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했던 약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힘으로 대변되는 근육이 세상을 지배하고 여성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여성의 존엄성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고 그들은 단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었다. 여성은 부모에게 속해 있거나 남편에게 속해있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그런 야만적 시대였던 것이다.
아이는 어린 시절 눈에 띌 정도로 외모가 특별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IQ가 높지도 않았다. 덩치가 좋아 힘이 세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집안 배경이 좋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 벌어 끼니를 때우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
사나이의 어린 시절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에 대해서 말해 주시오.’라고 물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크든 작든 정치적임을 알아야 한다. 정치는 편집이고, 편집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하물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사람에 관한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과거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기록에 남겨진 ‘맥락’과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남겨진 문서라는 편집본을 전적으로 믿는 것도 아닌, 이성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사나이가 생전의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 살펴보면 그 인생의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어떤 언변이나 잘 쓰인 글보다 한 사람의 일관된 행동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그가 죽기 전까지 함께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병들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장애인들, 기득권에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들, 돈은 많으나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하는 고리대금업자들, 사기꾼이나 좀도둑들같이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부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온갖 죄인들과 취약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으나 결코 그들에게 끌려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중력이 큰 별이 행성들을 끌어당기듯이 그가 소외된 인간들을 끌어당겼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성장하면서 무엇을 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어른이 되어 갔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가난해 본 적이 없는 부자들은 가난을 나약함의 징표로만 볼 뿐 가난의 고충에 공감할 수 없다. 취약함과 질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생명체의 유한함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건강과 강인함을 맹신한다. 그들은 병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으나 병자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모욕과 멸시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군중은 기적을 원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기를,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를, 죽은 내 가족을 다시 살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에게 왔다. 혹은 그가 사람들을 모아 혁명이라도 일으키기를 바랐다. 그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고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은 계속 아팠고, 민중은 지배자들의 착취 속에서 계속 가난에 허덕였으며, 죽은 자는 말없이 육신이 부패될 뿐이었다. 사나이는 그저 사람들이 아픈 곳에 가서 손잡고 그들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이 실망하여 욕을 하고 그에게서 떠나가도 그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같이 얘기하고, 식사하고, 기도하고, 도와주었다.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고 그들과 순간을 함께 공유했다. 그는 깨끗하고 정돈된 높은 단상에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마치 진흙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더럽고 냄새나는 바닥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자들을 향해 분노했고, 때로는 부자들을 만나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재산이 아님을 알렸다. 부자들 중 몇몇은 실제로 그의 말에 공감하고 감명을 받았으나 실제로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사나이를 따르는 이는 드물었다. 사람을 향한 멈추지 않는 그의 보편적 사랑은 느리지만 조금씩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