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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성의 고리 - 두 번째 이야기 (5)

05. 탈출구를 찾아 헤매다

by 청랑

05. 탈출구를 찾아 헤매다


스무 살. 어린 나의 마음은 닻을 내리지 못한 배처럼, 쉬어야 할 항구를 찾지 못한 배처럼 아무런 목적지 없이 시간을 따라 부유할 뿐이었다. 떠나버린 아버지의 빈자리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바쁘고 힘든 나의 어머니 아래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누구도 나에게 가야 할 방향이나 비전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방향은 알았으나 동기도 의욕도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 그 당시 나는 잠시 쉬어 갈 고향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족과 고향과 어릴 적 친구들과 짝사랑은 흩어져 사라지는 구름처럼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공허한 가슴을 안고 불완전한 인생을 구해줄 구원자를 기다리던 소년은 맑고 차가운 어느 겨울 아침에, 아무에게도 연락 올 일 없는 그런 날에, 가방을 메고 집을 떠났다. 어린 동생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소년은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났다. 먼 남쪽 고향 바다가 보고 싶어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똑똑” 그 집의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이미 해는 산을 넘었고 땅거미가 지며 하늘을 진한 자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누구요.”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체격의 남자가 나왔다. 이미 나이가 육십은 되어가는 듯 보였다.


“저는, 혼자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입니다. 혹시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떨림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겁도 많았던 나에겐 이상한 일이지만, 그건 나쁜 의도를 숨기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당당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3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가 나를 잠시 보더니 일단 들어오라고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 집은 국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농가였다. 집 안에는 남자와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소 놀란 듯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더 그녀에게 인사하고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일단 식사부터 하라고 말하며 밑반찬을 내어주었다. 맥주를 마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거실에서 세 명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은 나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그분들이 물어보았던 것 같다. 나는 서울 주변에 있는 전문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고 고향인 여수까지 걸어서 도보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오고 나서 부부의 아들이 집에 들어왔는데 그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신기한 듯이 다른 집들 중에서 왜 우리 집에 왔냐고 물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국도에서 가까이 위치하여 대문을 두드렸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하고 아주머니는 창고로 쓰는 방에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나에겐 매우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방에 몸을 누이자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근심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로 따뜻한 밥과 국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생, 괜히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집에 들어가요.” 그녀가 남긴 이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에겐 돌아갈 따뜻한 가족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부서진 가족을 지켜내기엔 내가 너무 나약하다는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불가능할지도 모를 스무 살 소년의 경험은 어른이 된 나에게 하나의 작은 기적으로 남았다. 나는 사흘을 채 걷지 못하고 도보여행을 포기했다. 다리 뒤쪽 햄스트링 근육이 부어올라 더 이상 걷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여행을 포기한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남쪽 고향 바다로 내려갔다.


짧았던 이 여행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후에 나는 다니던 야간학교에 자퇴서를 내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입대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고, 싸우고, 도망가고, 취하고, 울고, 웃고, 달리고, 땀 흘리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보고 싶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괴로워하고, 죽고 싶고, 아프기를 여러 차례, 그 모든 기억 사이를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계속 걸었다. 그리고 나는 마흔 무렵이 되어서 인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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