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가진 집단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자가 만들어 놓은 착취적 구조에 피지배자가 순응하는 것이다. 즉 시스템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 즉 선구자는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요즘 시내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꾸 헛소리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한 원로가 말했다.
“저도 그 얘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그 작자가 가진 것이라고는 옷 한 벌에 다 닳은 신발 한 켤레라고 하던데, 우리가 그런 일개 비렁뱅이에게 신경이나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른 원로가 대답했다.
“조만간 제국의 총독이 올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총독을 잘 모셔야 조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남기겠지요. 지금은 길거리를 떠도는 일개 촌놈 따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제가 염려하는 것은 총독이 왔을 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소동이지요.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민심이 흉흉해서 우리 원로들에 대한 불만이 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히려 그 남자를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원로가 말했다.
“백성은 날짐승과 같아서 날뛰지 못하게 하려면 배를 불리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게 해야 긴장이 해소되는 법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부족한 판에 개, 돼지의 배를 불릴 순 없고…… 어린양 한 마리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원로들은 무슨 말인지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나이를 따르는 무리가 다시 사나이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위정자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랑과 증오는 그 속성이 생각보다 많이 닮아있다. 열렬하게 어딘가에 몰두하는 속성은 사랑에도, 증오에도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사나이는 사랑뿐만 아니라 용서를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용서 없는 사랑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언제든지 증오를 향해 질주할 수 있다. 그를 따르는 군중은 언제든지 그를 증오할 수 있었고, 사나이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배자들이 할 일은 조용히 루머를 퍼트리는 일이었다. 이 남자로 인해 우리가 사는 터전의 땅값이 떨어지고, 그자의 말대로 살면 모두가 가난해질 거라고 말이다. 심지어 아이들도 영향을 받아 가난한 어른이 될 거라는 루머를 퍼트린다. 자식을 향한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어서 거기에 이성이 끼어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군중의 '혐오'를 등에 업으면 인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의 목숨마저도 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사나이는 오늘따라 그들 열두 명을 찬찬히 한 명씩 바라보았다. 못 배우고 거칠었으나 반면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강한 척, 센 척 허풍을 떨지만 그들은 결국 관리와 군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교양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말은 거칠었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 그들은 가릴 것 없이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나이와 함께 먹고 자고 일하였다. 사나이는 작은 마을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라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의 온기는 만나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생, 그렇게 넋 빼고 있지 말고 이리 나오슈!” 체격이 우람하고 얼굴에 털이 많은 그의 제자가 그를 끌고 나왔다. 호탕하게 웃으며 그가 사나이 앞에서 음악에 맞추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사나이도 덩달아 웃으며 그와 함께 춤을 춘다. 한바탕 춤을 춘 사나이는 잠시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그가 말하자 털 많은 제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을 만나 함께 먹고, 자고, 활동한 지도 어느새 3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지내면서 그대들이 겪은 고충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여러분이 나를 만나 더 가난해졌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꼈던 가난한 사람들마저 언젠가부터 우리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뿌린 씨앗이 뿌리내리고 자라서 열매 맺을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선생! 나는 평생 뼈 빠지게 일하며 살았소. 내 가족들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배우고 가진 양반들이 하는 일이라곤 내가 애쓰고 번 돈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내 것을 가져가면서 나를 겁박했을지언정, 정작 내가 누군지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지금 가난한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일 년이 지나도, 십 년이 지나도,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을 거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단 것이었소. 그것이 바로 절망이지요. 내가 내 아이들에게 대체 어떤 희망을 보여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평생을 살았는데 내가 선생을 만났소. 나보다 어린 양반이, 나보다 가진 것도 없는 양반이 나를 보더란 말입니다. 술에 절어있는 내 옆에서 몇 날 며칠을 선생이 있었소. 내가 선생을 따라나섰고, 선생의 삶을 보았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생 덕분이오.” 털보 제자가 말했다.
“여기 존재하는 나는 찰나의 시간을 지나가는 빛과 같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나의 빛을 나누어 주었으니,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대들이 받은 빛이 세상을 구석까지 비출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끝 날까지 내가 여러분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져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사나이가 말했다.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자 한 명씩 두 명씩 자리에 엎드려 잠들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새 깊은 밤을 지나고 있었고 사나이는 평소와 다르게 잠들지 않고 제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달이 보고 싶어 져 밖으로 나갔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그의 코 속을 통과해 허파꽈리를 채웠다. 하늘에는 하얀 달이 밤하늘에 선명한 각을 새기고 그 주위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가득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밤하늘은 신비롭고 경이롭다. 사나이는 자신과 자기가 두 발을 딛고 있는 땅과 저 멀리 펼쳐진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눈으로 이 세계의 본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의 감각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세계를 볼 수 있고, 두뇌의 기능이 허락하는 만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같이 이토록 경이로운 우주와 신(神)을 인간의 오감을 사용해 관상(觀想)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문득 어두운 밤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어느새 그의 주위에 달빛에 빛나는 차가운 쇠붙이들이 빛났다. 짧은 순간, 오늘 밤이 그동안 함께 했던 그의 벗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였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곧 마무리될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아침의 태양이 서산 너머로 지는 노을이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필연적인 것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태양이 다시 솟아오를 것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올라갔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바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와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지금이야말로 괴물을 마주 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 이상 도망가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낭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 속에 들어있는 의혹과 혐오, 증오, 그리고 두려움은 사나이 자신의 어둠이기도 했다. 그제야 신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고 했는지, 그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들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들을 나는 용서합니다.” 사나이는 소리 내어 말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기에 그들은 잠시 멈칫거렸으나 다음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사나이는 차갑고 커다란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달빛 아래 환하게 빛나는 대지에 그의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의 용서가 각인처럼 죄인들의 눈 속에 깊이 박혔다. 증오와 경멸로도 지워지지 않는 용서의 깊은 상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