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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24. 2021

모든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있는 글

글쓰기, 구체성과 TMI 사이에서  

공적인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설득하는 과정이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거나 정보를 얻었고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감정을 느꼈는데 너도 한번 내 이야기에 공감해 보지 않을래?’ 말을 건네는 작업. 불특정 다수인 독자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구체적이고 명확한 글쓰기를 하다 보면 자꾸만 설명을 덧대게 된다. 오해받지 않으려 이 내용 저 내용 더하다 보면 어느새 글은 구구절절해진다. 대화를 상상해 볼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인생이 딸려오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할까’‘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듣는 사람은 점점 지쳐간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구체성과 TMI 사이에서 고민할 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떠올린다. 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고 언제 이야기를 멈춰야 할지 정확히 아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고 감독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영화다. 키키 키린이 극 중에서 첫째 아들의 제사를 준비하는 어머니 역할로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평생을 살며 자식 셋을 키워낸 전형적인 어머니 같지만 마음속에 비밀을 품고 있다. 영화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첫째 아들의 제사를 준비하고 지내는 1박 2일을 담고 있다.


<키키 키린의 말>(마음산책) 뒤표지

고 감독이 키키 키린을 인터뷰한 <키키 키린의 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중략)…어머니의 이야기를 찍어두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게 <걸어도 걸어도>가 탄생한 계기 중 하나죠. 단, 바로 얼마 전까지 조금씩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작품을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오히려 어머니의 병상 옆에서 떠올린 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일뿐이었거든요. 아주 사소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어머니의 뒷모습이나 부엌칼을 쥔 손, 독설도 그렇고요


…(중략)…실제로 개봉 후 홍보차 오사카에 갔을 때 신문기자분께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을 조금 더 묘사하려는 생각은 없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저로서는 아들이 본가 욕실에서 더러워진 타일과 새 안전 손잡이를 발견하는 장면에 씨앗을 하나 뿌려두었으니, 그 장면이 관객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늙어가는 과정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죠. 처음에 뿌려둔 불안의 씨앗을 봤으니 그 뒤 암만 건강한 아버지, 어머니를 봐도 뭔가 마음에 걸리잖아요. 저는 그거면 됐을 듯했어요.”


<걸어도 걸어도>에서 음식을 하고 있는 키키 키린의 뒷모습


“어머니의 뒷모습, 부엌칼을 쥔 손, 독설…” <걸어도 걸어도>에는 구체적이고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담담하게 살아 있다. 영화에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옥수수튀김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옥수수 낱알을 어떤 식으로 풀어놓을지, 기름 온도를 몇 도로 할지, 튀김옷의 양은 얼마나 할지. 세세한 것 하나까지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구체적이고 명확한 묘사 덕분에 우리는 영화 속 인물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관객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하지 않는다. 관객은 감독이 던져놓은 “씨앗"을 보고 어머니라는 인물에 대해, 지질한 둘째 아들 ‘료타'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짐작할 뿐이다. 몇 가지 결정적인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묘사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고 감독의 인터뷰를 읽으며 철학자 김진영의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를 떠올렸다. 구체성과 마침표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아름답고 슬픈 글.


“오늘은 주영이 화실 가는 날. 외출을 망설이는 등을 떠민다. 내 재촉을 못 이겨 거울 앞에 앉은 모습을 바라본다. 작고 동그란 몸. 늘 웃음을 담고 있다가 아무 때나 홍소를 터뜨려서 무거운 세상을 해맑게 깨트리는 웃음 항아리 같은 몸.

나는 이 잘 웃는 여자를 떠날 수 있을까.”


종이책 기준으로 6줄도 채 되지 않는 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나와 다른 타인인 독자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독자에게 공간을 줘야 한다. 공적 글쓰기는 타인인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터질  빈틈없는 공간에서 독자는 길을 잃고 이내 차가워진다. 공적 글쓰기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 아닌 '무엇을  것인가' 고민하는 과정이다.  

 




창고살롱에서 글쓰기 살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기자, 에디터로 글 다루는 일을 하면서 고민했던 '공적 글쓰기'에 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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