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부터 퇴고까지, 완성하는 글쓰기
일부러 사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내 관심사, 취향과 닮아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허벅지 쿡쿡 찔러가며 기어이 읽지 않는 책. 어떤 책은 호기심에 구입까지 해놓고 책장에만 고이 꽂아두기도 한다. 주로 그런 책은 에세이가 많다. 내가 쓰고 싶었던 주제 혹은 끝내 쓰지 못한 주제에 대한 에세이. 이게 다 질투심 때문이다.
‘부럽다' 말하지 않는 건 자존감보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잘 쓴 글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가 이내 꼬였다. 나는 결코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통찰력, 표현력, 문장력. 어떨 때는 그 사람 고유의 경험과 삶까지 시샘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심심하지. 인스타그램에서도 일부러 글 쓰는 사람은 팔로우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글쓰기 수업을 열었다. 창고살롱에서는 [살롱IN살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노션/운동/그림책/영어그림책 등 다양한 클래스가 열리는데 그중 글쓰기 수업을 맡게 되었다.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서 두 그룹으로 나눠 각각 두 번씩, 총 4번의 살롱을 진행했다.
글쓰기 살롱은 초고를 쓰는 것부터 시작한다. 매일 글쓰기 하며 쓰는 근육을 만드는 것, 물론 중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자신의 글을 요리 보고 저리 만지며 완성도 있는 글 하나를 완성해 보는 경험도 중요하다. 글쓰기 살롱은 후자를 목표로 한다. ‘이게 내가 쓴 글이야’’여기에 내가 담겨 있어', 공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글을 완성해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했다.
10년 넘게 취재기자, 편집기자, 소셜벤처 콘텐츠 에디터 그리고 창고살롱 Narrative Connector로 일하면서 수많은 글을 쓰고 또 편집했다. 취재기자에서 편집기자가 되는 경험은 큰 전환점이었다. 글 좀 쓰는구나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하루에도 남의 글을 수십 개씩 편집하면서 알게 됐다. ‘아 그동안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뱉어내고 있었구나.’ 처음으로 내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일기장에 묻어두는 글이 아니라 타인에게 가닿는 공적인 글이 되기 위한 한 끗. 그 한 끗을 위해 어떤 부분을 수정, 보완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필진과 소통하며 글을 완성해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글이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마치 내 글인 것처럼 기뻤다(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글을 편집할수록 나도 내 글이 자꾸만 쓰고 싶어 졌다. 나만의 서사를 써내려 가고 싶었다. 그렇게 퇴사를 했다.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내 삶은 바꿀 수 있다. 글쓰기는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경험과 관계를 깊이 들여다 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은유 작가의 말처럼 글을 쓰고 나면 내가 조금은 투명해진 것 같았다.
글쓰기 살롱을 시작할 때 즈음, 글쓰기에 많이 지쳐 있었다. 상세 페이지를 만들고 노션과 인스타용으로 다시 다듬고 매일매일 마케팅용, 소통용 글을 썼다. 시즌1이 오픈된 후에도 각 살롱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하고 콘텐츠로 만들었다. 어찌나 손을 많이 썼던지 손가락이 얼얼했다. 글자라면 쳐다보기도 싫어 매일 유튜브, 넷플릭스, 왓챠를 전전했다.
살롱을 앞두고 글쓰기 과제를 냈다. 참가자들의 글을 미리 하나하나 읽었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으면 잘 쓴 글을 봐도 더 이상 질투가 나지 않았다. 첫 문장부터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보면 설렜다. 어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이런 사유를 했을까.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다음, 또 다음에는 어떤 문장이 나올까 기대되고 궁금했다. 여기에서는 왜 이런 문장을 썼을까. 이야기가 좀 더 있을 것만 같은데 왜 여기서 끝났을까. 이렇게 쓰면 더 가독성 있을 것 같은데. 글 하나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며 메모했다.
살롱 당일, 공적 글쓰기와 가독성 있는 글쓰기에 대한 짧은 강연을 한 다음 각자 써온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혼자서 눈으로 글을 읽을 때와 도란도란 줌 안에 둘러앉아 글쓴이의 목소리를 듣는 건 전혀 달랐다.
낭독 이후에는 돌아가면서 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묻고 서로 피드백했다. 처음에는 긴장됐다. 누군가 내 글을 평가한다는 게 서로 불쾌하지 않을까. ‘너는 얼마나 잘 썼길래'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사실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글을 편집할 때는 글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길게 썼어. 퇴고도 안 한 거야? 비문이 왜 이렇게 많아.' 탁탁, 타다닥. 엔터키를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글을 봤다. 기사를 편집하는 게 아니라 쳐낼 때가 많았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건 오류 없는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망신 주기 위함이 아니라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기를, 더 나은 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솔직하게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글에서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떤 문장이 마음에 남았는지 혹은 이 부분에서는 이런 내용이 좀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고, 여기는 왜 이렇게 썼는지 궁금하다고.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참가자가 누군가 자신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주고 진심 어린 피드백을 해준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는 알기 어려우니까. 타인의 글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자신의 글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글을 함께 쓰고 읽는다는 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자기를 조금만 더 드러내도 될 것 같은데 왜 여기까지밖에 안 썼을까, 이 문장에서 주저하는 마음이 보이는데 어떤 생각이 풀리지 않은 걸까. 피드백하면서 물어보면 얽힌 실타래가 분명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확장됐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갔고, 때로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다.
글쓰기 살롱에서 내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다.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글감을 정하고, 꼼꼼하고 섬세하게 글을 읽으면서 적절한 피드백을 하고,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저렇게 써보면 어떨까 함께 고민하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역량(쪼안쪼=쪼는 듯 안 쪼는ㅎㅎㅎ)을 다 해 돕는 것. 무엇보다 그 사람의 글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글쓰기 살롱을 하는 내내 나는 내가 타인의 재능에 질투하거나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함께 글을 읽고 쓰는 동료들이 있어서 좋았다. 얼굴이 상기돼서 글을 읽는 사람, 진지한 표정으로 그 글을 경청하는 사람, 조심스럽게 피드백을 하는 사람, 고개 끄덕이며 메모를 하는 사람. 글이 대체 뭐라고. 우리는 이 늦은 밤 이렇게 모여있는 걸까. 줌 화면 안에 모여 있는 우리가 사랑스러웠다.
이번 시즌은 좀 더 소규모로 글을 쓸 수 있도록 참가 인원을 조정하고, 횟수를 늘렸다. 3개월간 3편의 초고를 쓰고 3편의 글을 완성할 예정이다. 내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서로의 글을 오래오래 보듬어주고 싶다면, 멋진 글쓰기 동료를 만나고 싶다면. 글쓰기 살롱을 신청하면 된다. 밤 시간과 낮시간 모두, 창고살롱 멤버가 아니어도 신청 가능하다(창고살롱 멤버는 할인가 적용).
자세한 커리큘럼 확인과 신청은 여기에서.
한밤의 글쓰기는 마감됐습니다. 한낮의 글쓰기만 신청 가능합니다:)
한낮의 글쓰기도 마감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