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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Oct 18. 2021

글쓰기, 꼭 책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글쓰기와 책 쓰기에 대하여

“편집부로 가보면 어때. 글 보는 눈이 달라질 거야.”


언론사 입사 4년차. 취재부에서 편집부로 부서를 옮겼다. 부서 이동을 결심하게 된 최초의 감정은 열패감이었다. 취재기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온 직업이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됐는데 취재기자라는 옷이 나와 맞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기자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즈음, 취재부에서 특종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 편집부로 옮긴 선배가 조언을 했다. 어차피 글은 평생 쓸 거 아니냐고. 편집부에서 다른 사람 글 보다 보면 네 글도 분명 더 좋아질 거라고. 글 잘 쓰는 선배 말이니 속는 셈 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의 글을 편집하면서 선배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가 글을 좀 쓴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매일 하면서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까지 글을 그냥 뱉어냈구나.’


다른 사람의 글을 볼수록 내 글이 보였다. 내가 작은따옴표와 쉼표를 참 많이 썼구나 같은 기술적인 것부터 ‘내용이 좋으니까 읽겠지'라는 생각으로 투척했던 A4 7장짜리 글이 얼마나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쓰기였는지, 충분한 사유와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은 단번에 티가 난다는 것까지. 한 편의 글에는 마치 지문처럼 생각보다 많은 것이 묻어났고 한 편의 글을 쓸 때는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다.


아는 게 많으면 겁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편집을 할수록 글 쓰는 게 두려워졌다. 표현 욕구가 생길 때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블로그에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제목으로 글을 쌓아갔다. 그즈음 나는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을 글, 오해 받지 않을 안전한 글을 쓰다 말았다 했다.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을.


공적인 에세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엄마가 되면서였다. 엄마로 사는 게 힘들 줄은 알았지만 내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뭔지. 세상은 왜 이리 엄마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게 많은지. 출산 후에도 남편의 커리어는 흔들림 없는데 왜 내 커리어만 위태로운지. 복직을 앞두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겪는 죄책감은 왜 엄마만의 몫인지.


독박육아, 맘충, 노키즈존….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겪는 모든 게 억울하고 분했고 때로는 무력했다. 책 속에는 답이 있을까. 아이가 잠들면 캥거루처럼 배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잠든 아이의 등을 받침대 삼아 걸신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분홍색 표지의 책(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은 나를 다시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고 싶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엄마됨에 대해 그저 “힘들다”가 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왜 힘든지 정확하게 언어화하고 싶었다.


2018년 동료들과 함께 나를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웹진 <마더티브>를 창간했다. 아이와 함께 엄마도 자란다는 의미에서 ‘엄마발달백과’라는 제목으로 임신, 출산, 육아 이야기를 글로 썼다. 자연분만, 모유수유, 조리원, 보조양육자, 어린이집 등 초보 엄마들이 고민하는 키워드에 대해 에디터들 각자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공유했다. 나처럼 처음 엄마가 돼서 외롭고 막막할 독자를 상상하며 글을 썼다. 치유 받는 건 나였다. 엄마에게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모성신화를 비판적으로 직시할 수 있었고,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던 과거의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3년 전에 쓴 글에는 지금도 조리원에서 울면서 읽었다고, 감사하다는 댓글이 달린다.

 


책을 내고 싶다!


엄마발달백과를 포함한 마더티브 콘텐츠는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공적 글쓰기의 가치를 알게 되면서 이제는 내 삶의 맥락과 사유를 오롯이 담은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었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새 글을 올릴 때마다 혹시 출간 제안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다.


브런치에는 출간 제안을 받았거나 계약을 했거나 출판사 수십 곳에 투고를 했다는 경험담이 넘쳐났다. 브런치가 출판 등용문으로 불리면서 브런치 합격을 목적으로 하는 유료 클래스까지 생겨났다. 신기했다. 책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책 쓰고 싶은 사람은 어쩐지 점점 많아지는 상황이. 물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브런치를 통해 몇 번의 출간 문의와 제안이 오기는 했지만 출간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워킹맘 이야기는 시장이 좁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출판도 결국은 책을 파는 일이기에 명확한 주제와 대상 독자를 설정하는 게 중요했다. 책을 파는 일이라면 나도 조금은 알았다. 지금까지『엄마는 누가 돌봐주죠』를 비롯해 몇 권의 공저를 냈다. 처음 책을 내기 전에는 책을 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감사했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알아봐 주고, 물성을 가진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해줬다는 사실만으로 벅차고 설렜다.


책을 내는 과정은 원고를 마감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만든 책을 알리고 팔아야 한다. 책의 운명이 결정되는 골든타임은 초반 1-2달. 한 주에도 수십 권씩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시선을 끌지 못하면 이후에도 그 책은 주목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내가 낸 책 중에도 어떤 책은 몇 년째 1쇄도 소진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건만 빛도 못 본 채 쌓여 있는 책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아는 게 많으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글쓰기의 목적이 책 쓰기가 되자 자꾸만 상품성을 고려하게 됐다. 이 글이 과연 책으로 엮어서 팔릴 만한 글일까, 이 글은 어떤 분야에 들어가야 할까, 어떤 점을 강조해서 써야 할까 고민하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날이 늘어갔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 눈에 띌 만한 글, 특정 주제나 분야로 묶일 수 있는 글, 좀 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글의 평가 기준이 철저히 외부에 있었다.


내 삶은 깔끔하게 특정 분야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내 이야기가 워킹맘 이야기인가. 글쎄. 나는 엄마였지만 엄마이기만 하고 싶지 않았고 일을 잘 하고 싶었지만 일에만 매몰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회사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이 행복했다가 회사의 경계 지어진 삶이 그리웠고, 어떤 날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에 찼다가 도무지 아무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어떤 날은 책이 너무나 내고 싶었고 어떤 날은 책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출간 투고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으면서 ‘왜 나는 그럴 듯한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이 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별로인 글을 계속 쓸 필요가 있는 걸까’ 자기혐오에 빠지기를 여러 번. 출판할 수 있는 글에 집착하자 글쓰기가 더는 즐겁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이 한없이 못나 보였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 책을 내고 싶은 걸까. 쓰는 일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을 내건 책을 내면 내가 정말로 ‘쓰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책을 내고 이름을 알리다 보면 언젠가는 쓰는 일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책을 내고 싶은 건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꼭 책을 내야만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 공적 에세이를 쓸 때를 떠올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토해내듯 글을 쓰던 시간을. 글을 쓰고 나면 어지럽고 혼란했던 마음과 머리가 정갈해졌다. 나를 통과한 시간과 경험을 그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게 무엇이 남았는지 언어화 하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선명해졌다. 울퉁불퉁 엉망진창이어도 삶의 주도성을 내가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삶의 화살표를 내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나가는”(홍은전 <그냥, 사람>) 것 같았다. 책이 되는 글을 쓰지 못 해도, 본업 이외의 토막 시간을 아껴 감질 나는 글을 써도, 나는 이미 쓰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글쓰기에 진심인 까닭


@홍밀밀

 

글쓰기의 즐거움을 다시 알게 된 건 글쓰기 수업 덕분이었다. 지난해 겨울부터 여성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창고살롱’에서 ‘글쓰기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봄부터 3개월간 진행한 글쓰기 살롱에서는 3주에 한 번 공통 주제에 대해 초고를 쓰고, 줌 수업에서 나온 피드백을 바탕으로 퇴고 글을 완성했다. 그렇게 3개월간 세 편의 초고 글과 세 편의 퇴고 글을 함께 썼다.


글쓰기 수업에는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경험이 있는 멤버부터 공적인 글은 처음이라는 멤버까지 다양한 멤버가 참여한다. 혼자서는 글이 잘 안 써져서,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마감 압박이 필요해서. 저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이유는 같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어서.   


줌(Zoom) 수업에 앞서 멤버들은 초고를 커뮤니티 채널에 올린다. 첫 번째 주제는 ‘자꾸만 미련이 남는 일’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미련부터 꿈에 대한 미련,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미련, 커리어에 대한 미련 등 같은 주제로도 각자의 삶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나왔다.  온라인으로 하는 수업에서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각자 써온 글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다니. 학창 시절 이후 처음 해보는 경험에 줌 화면 너머 멤버들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민망함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멤버, 긴 분량을 의식하며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멤버, “아, 이 부분 이상하네요.” 즉석에서 바로 퇴고하는 멤버, 글 쓸 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멤버도 있다.


낭독이 끝난 후, 각 멤버는 서로의 독자가 되어 피드백을 한다. 처음에 두루뭉술했던 피드백은 시간이 지날수록 뾰족해진다. 평가나 지적이 아니라 타인의 글이 좀 더 완성도 높아지기를 바라는 피드백임을 알기에 누구도 불쾌하지 않다. 나의 글을 누군가 이렇게 정성스레 읽고 꼼꼼히 피드백 해주다니. 오히려 감사하다. 멤버들은 말한다. 공적인 글쓰기를 하고 피드백 답변을 고민하다 보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집요하게 붙들게 된다고. 뿌옇던 생각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고. 그 과정이 괴롭지만 즐겁다고.  


글을 읽고 울고 웃으며 밤 10시에 시작된 온라인 수업은 밤 12시가 훌쩍 넘어도 끝날 줄 모른다. 서로의 글에 한 마디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는 진심이 표정에 묻어난다. 호구 조사를 한 것도 아닌데 단 몇 편의 글을 나누는 것만으로 서로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나의 세계에 대해 썼을 뿐인데 함께 글을 쓰고 읽으며 우리의 세계는 더욱 넓어진다. 혼자만 일기장에 글을 썼다면 결코 몰랐을 기쁨이다. 그렇게 완성된 퇴고 글은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해진다. 깊고 풍성해진다.  


가끔은 신기하다. 글쓰기가 뭐라고 우리는 이렇게까지 진심인 걸까. 삶이 글이 되는 경험, 그 자체에 몰입하며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는 멤버들을 지켜보면서 책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쓴 글을 믿지 못했던 시간이 부끄러워졌다. 그날도 2시간 훌쩍 넘는 수업이 끝날 때 즈음, 한 멤버가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모두 작가님들이라고. 작가님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고. 뜨끔했다. 자신만의 글을 쓰고 있다면 작가가 될 수 있는데 나는 어떤 승인을 바랐던 걸까.


이제 더는 타인과 인정과 선택을 기다리며 책이 될 수 있는 글을 고민하지 않으려 한다. 계속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쓰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꾸준히, 즐겁게, 내 삶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치열하고 성실히 고민하면서. 그것만으로도 글쓰기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 글은 격월간 잡지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실제 잡지에는 조금 더 편집된 글이 게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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