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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13. 2020

내 책 내고 싶은 욕망에 대하여

자꾸만 초라해지나요?

소설 쓰는 친구를 만났다.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했다는 친구는 누군가의 선택을 그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낸 소설이 소위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야 하고, 등단하지 못하면 그 소설을 발표할 지면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 친구는 자기가 쓴 소설이 꼭 자기 자신 같아 자꾸만 상처가 된다고 했다. ‘제발 나 좀 뽑아주세요’ 구걸하는 기분이 든다고.


에잇 더러워, 그냥 안 쓰고 말지 싶었다가도 친구는 또다시 소설이 쓰고 싶어 진다고 했다. 혼자 소설과 밀당하는 것 같다고.


쓰는 사람이 된다는 건 끊임없이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친구의 푸념이 남일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냈지만 아직 단독 저서는 내지 못했다. 세 번째 책까지 공저로 나오자 주변에서는 “이제 단독 저서 내야지?”라는 말이 나왔다.


퇴사 후 1년 넘게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리면서 내심 그래도 언젠가 출간 제안이 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매일 메일함을 열어볼 때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주변에서 책을 많이 냈다. 그때마다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마음 한편이 쓰렸다.


올해는 꼭 단행본이 될 만한 기획을 해봐야지 했다가, 누군가의 간택만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상황이 자존심 상해서 독립출판을 고민하기도 했다(독립출판 워크숍까지 들었지만 완주 못한 1인...)


그러다 내가 왜 이리 책에 집착하는 걸까, 책 읽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드는 마당에 책 낸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며 애써 책에 초연해지려 했다.


이번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응모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욕망이 너무 크면 상처가 되니까. (또다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책만 내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 좋은 책, 팔리는 책을 내고 싶은 거잖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을 만큼 생각과 글이 정돈되면 그때 책을 내면 되지 않겠냐고. 나만이 쓸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쌓아가자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글을 쓰고 팔리는 책을 내는 작가들을 끊임없이 시기했다. 어떤 책들은 아무리 내용이 궁금해도 끝끝내 사보지 않았다. 질투심이 폭발할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SNS와 서점 앱을 지웠다 깔았다를 반복했다. 아, 찌질해.




투명한 욕망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책표지


번역가 노지양 작가가 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는 ‘내 책’을 내고 싶은 욕망을 투명하게 고백하는 책이다.


-책 내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내가 쓰고 싶은 글과 쓸 수 있는 글의 간극이 너무 커서 정작 내 글은 한 줄도 못 쓰고


-다른 사람이 낸 책을 볼 때마다 질투심으로 불타오르고


-SNS를 보며 능력 있는 여성, 글 쓰는 여성, 책을 출간하는 사람들과 나를 계속 비교하고


-일단 잡지나 신문에 기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잡지사에 글 쓰고 싶다 제안했다가 답장도 못 받고


-트위터에 “새로운 필자를 원하시나요? 저를 써보세요”라는 트윗 올렸다 또 굴욕 당하고.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구구절절 공감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노지양 작가처럼 솔직하지 못했다 것.


“왜 욕망은 없어지질 않지? 왜 이 욕망 때문에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고 있지? 왜 자꾸 비참해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이 감정은 언제쯤 사라지고 그저 그런 책이라도 꾸준히 하는 번역가로만 만족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이 대목을 읽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왜 이 욕망은 없어지질 않는 걸까. 왜 자꾸만 비참해지는 걸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면 그런 생각도 든다. 세상에 이렇게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유명하지도 않고 특출난 재능도 없는 내가 계속 노력한다고 되는 걸까. 에잇 더러워, 그냥 안 쓰고 말지. 글쓰기와 밀당하게 된다. 나만 안달복달하는 밀당. 아, 자존심 상해.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 스틸컷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에는 좀비 영화를 찍는 영화부 고등학생들이 나온다.


오타쿠 냄새 폴폴 풍기는 영화 부원들은 동아리실도 따로 없이 검도부 한구석에 몸을 부대끼고 앉아 소품을 만든다. 촬영 장소 하나 구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담당 교사 때문에 찍고 싶지도 않았던 연애물을 찍었다 웃음거리가 된 영화부는 자신들이 찍고 싶었던 영화를 찍기로 한다. 바로 좀비물. 누가 봐도 어설픈 분장에 조악한 소품. 그래도 본인들은 세상 진지하다.


정작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히로키


영화 후반부, 잘 생기고(정말 잘 생김...) 인기 많은 ‘인싸’ 히로키와 영화부 감독 ‘아싸’ 마에다가 옥상에서 마주친다.


히로키는 마에다의 8mm 필름 카메라를 마에다에게 들이대며 장난스럽게 묻는다. 장래에 영화감독이 되는 거냐고. 아카데미 수상도 하냐고.


그러자 마에다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한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아무래도 영화감독은 무리라고.


“그럼,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카메라로 굳이 영화를 찍는 거야?”
“그건, 음. 아주 가끔씩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랑 지금 우리가 찍는 영화가 연결됐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 정말 아주 가끔이지만 그게 그냥 좋으니까.”


그 장면을 보며 영화 속 히로키처럼 나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남보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그 글로 뭔가를 이루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서 글을 쓰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힘들거나 화날 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 좋은 글이나 영화를 봤을 때,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눴을 때. 내 안에 글이 찰랑찰랑 넘쳤다.  


글감은 주로 내 삶과 연결돼있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일상을 글로 정리하고 나면 내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또 글을 쓰고 있었다. 타인의 평가는 그다음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간절함’, ‘포기 안 됨’이 재능일 수도 있다. 끝까지 수업에 나오고 한 장이라도 쓰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게 될 수 있다.”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남들에게 인정받아야만, 대단한 재능이 있어야만 글을 쓰거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꼭 베스트셀러 작가나 흥행 감독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신의 책을 손에 들게 된 노지양 작가는 말한다. 간절함, 포기 안 됨이 재능일 수도 있다고.


노지양 작가처럼, 마에다처럼. 때로는 간절히 노력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그게 그냥 좋은 마음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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