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Jun 29. 2021

답장 없는 출판 메일과 답 없는 쿨병

책 출간보다 중요한 것

출간 문의 메일을 받았다. 지난번 출간 제안이 물 건너간 후 출간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그래도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이 유난히 힘들고 지치는 날이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바로 답장을 보냈겠지만 침착하기로 한다. 출판사가 어떤 곳인지, 어떤 책을 냈는지, 그동안 어떻게 책을 소개하고 홍보했는지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본 후 며칠 있다 답장을 보냈다. 편집자가 아침에 출근하면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한 달째, 아무 답장이 없었다.



 쿨병은 지병



▲ 그리고 한 달째, 아무 답장이 없었다 ⓒ unsplash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쓴 글이 당장 답장을 보내 붙잡아야 할 만큼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겠지. 다른 출판사에서 낚아채어 갈까 걱정되는 글이라면 바로 답장을 보냈겠지. 그리고 아마 많이 바쁘겠지. 나도 늘 바쁘고 정신없이 사느라 챙겨야 할 것을 못 챙기며 사니까.


머릿속 쿨(cool) 회로를 가동한다. '그래, 출판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고 수익 날 만한 책에 투자하겠지. 편집자가 관심 있어서 문의했다고 해도 내부 회의 결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 저마다 다 사정이 있겠지. 이해 못 할 게 뭐야. 흑역사 또 생겼네. 하하하.'


지병처럼 품어온 쿨병은 스스로 만든 보호 장치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는다, 이런 일로 상처받을 필요 없다'는 자기 최면.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쿨한 사람이 아니다. 쿨하고 싶은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일 뿐. 부글부글. 억울 회로가 켜진다.


'메일 하나 쓰는 것도 다 노동력이 투입되는 일인데 고민해서 메일에 답장한 내 시간과 노력은 뭐가 되는 거야. 게다가 내가 먼저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물어봐서 답한 것뿐인데. 매일 메일함 열 때마다 혹시 하고 기다렸던 내 감정 노동은 어쩌냐고.'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기혐오와 연민이 시작됐을 거다.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 이렇게 두 번이나 흑역사가 생길 만큼? 출간 문의와 제안까지는 하고 싶지만, 계약은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애매한 글인가? 에라이. 글은 써서 뭐 하나.'


공저만 4권. 내 이름을 건 단독 저서를 내지 못한 건 오랜 열등감이었다. 한동안 '내 책' 내는 일에 집착했을 때는 글을 쓸 때마다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내 초라해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지금도 조회 수, 좋아요, 댓글, 공유 등의 숫자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그럼에도 더는 출간 여부로 내 글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잘 쓴 글과 못 쓴 글

 


▲ 지난해 말부터 '글쓰기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홍현진

 


지난 2020년 12월부터 창고살롱에서 '글쓰기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취재 기자와 편집 기자, 소셜벤처 에디터, 매체 창간인 등을 거치며 저널리즘 글쓰기부터 무언가를 팔기 위한 글쓰기까지 다양한 공적 글쓰기를 경험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쓰는 글마다 빵빵 터지는 영향력을 갖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내가 글쓰기 수업을 개설한 이유는 어쩌면 맥락 없어 보이는 나의 글쓰기 경험이, 자신의 글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글쓰기 살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드백이다. 전담 편집자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 객관적으로 피드백 받을 기회가 잘 없다. 수업 시간,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이 쓴 초고를 소리 내어 낭독한다. 이후 다른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글에서 좋았던 점, 보완됐으면 하는 점, 궁금한 점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다들 조심스럽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 글을 판단해도 될까. 피드백에는 두 가지 대전제가 있다. 첫째, 글에 담긴 삶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글 자체에 대해 이야기할 것. 둘째, 평가와 지적이 아니라 타인의 글이 좀 더 완결성 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이야기할 것.


수업이 한 회, 한 회 진행될수록 피드백은 점점 정성스러워지고 핵심을 파고든다. 한 멤버는 말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열심히 읽고 궁금해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일이네요."


나는 주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글을 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이 부분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 부분은 살짝 정리가 안 된 것 같은데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질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주 실패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십 편의 글을 봐야 하는 편집 기자 시절에는 잔뜩 화난 빨간펜 선생님처럼 글을 봤다. 이 글은 이래서 A! 저래서 B! 기준이 명확했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지 6개월. 멤버들의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고 있으면 잘 쓴 글과 못 쓴 글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 깊이깊이 들어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언어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 글과 그렇지 못한 글이 있을 뿐.


후자라고 해서 게으른 글은 아니다. 때로 부지런함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지 도무지 방법을 모를 때도 많다. 글쓰기 살롱에서 우리는 서로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글의 방향을 함께 고민한다. 며칠 후, 피드백을 반영해 퇴고한 글이 올라오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뭔지 알 것만 같다. 동시에 나도 부지런한 글을 쓰고 싶어진다.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는 가능성
 

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는 가능성 덕분이니까요.
-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작가의 말 중에서


글쓰기의 가치를 알게 되면 될수록 출간은 아무래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타인이 글을 통해 좀 더 정확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나의 불완전한 사유가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켄 리우)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부지런히 생각하고 더 부지런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쌓인 글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글쓰기는 충분히 기쁜 일이다. 출간 제안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내 글이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메일 쓰기'를 누르고 편집자에게 정중하고 솔직하게 이메일을 보냈다. 출간 제안이 곧 계약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메일을 보냈는데 한 달 넘게 답장이 없는 건 허무하다고. 계속 찝찝해하는 것보다는 다시 문의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메일을 보낸다고.


발송 버튼을 누르기 전 고민했다. 너무 지질한가. 너무 질척대나.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답장은 5분 만에 왔다. 너무 죄송하다는 사과와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 구구절절 이해가 갔다. 상황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을 정확하고 건조하게 전달했다는 것만으로 속이 후련했다. 참고로 지난번에는 3개월간 답장을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어떤 상황일지 짐작이 간다고, 마음이 편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출간 같은 건 안 돼도 아무 상관 없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건 진짜 내 마음과 달랐으니까. 글쓰기는 내 욕망과 한계를 투명하게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 건너간 출간 제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