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의심이 찾아올 때
새해 시작과 함께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경남 산청표 반건시와 분홍색 편지지에 손글씨로 적은 편지. 발신인은 은진님이었다. 은진님은 창고살롱 시즌1~3와 글쓰기 살롱 시즌1~3를 모두 함께 해준 멤버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선생님 현진님께'
2020년 늦가을, 창고살롱 시즌1 모집 공지를 올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가입자를 기다렸다. 당연히 지인이 가장 먼저 가입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첫 가입자는 낯선 이름이었다. 바로 은진님.
나중에 알고 보니 은진님은 내가 운영하는 브런치와 동료들과 공동 창간한 ‘마더티브’ 브런치 애독자 ‘마릴라'님이었다. 글을 올리면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아주는 분이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본명은 뒤늦게 알았지만.
“제가 처음 현진님 글을 본 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던 것 같아요. 현진님 글이 좋아서 울고 웃다가 창고살롱을 하게 되고 어느새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됐네요.”
은진님은 글쓰기를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정말 배울 게 많았다고, 1년여의 글쓰기 살롱 덕분에 자신의 글을 덜 부끄러워하며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편지에 썼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또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글을 매일 써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해봐도 글이 늘 똑같은 것 같아 답답했었는데 글쓰기 살롱을 하니까 그런 답답함이 사라지더라고요. 글이 느는 게 느껴지기도 하고, 꼭 글이 아니라도 저한테 너무 소중한 시간이 되니까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고, 글쓰기는 현진님께 배워야 한다 ㅎㅎㅎ"
붉어진 얼굴로 편지를 읽으며 은진님과 처음으로 함께 했던 글쓰기 살롱 시즌1이 떠올랐다.
10년 넘게 글 다루는 일을 했지만 내가 글쓰기를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내 글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돼야
혹은
-내가 좀 더 커리어적으로 유명해져야
내 이름을 걸고 클래스를 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무슨.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그래도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수업을 개설했지만 ‘과연 도움이 될까?’라는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글쓰기 살롱은 앞부분 나의 짧은 강의, 멤버들의 글쓰기 과제 낭독 그리고 상호 피드백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떤 내용을 강의할지, 피드백은 어떤 식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다. 내 글에 대한 평가를 받는 건 긴장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온라인에서 과연 피드백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피드백을 듣고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첫 번째 글쓰기 수업을 마친 다음날, 은진님은 슬랙에 장문의 후기를 남겼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기를 휴대폰 즐겨찾기 폴더에 간직하고 있다.
“어제 글쓰기 살롱은 과외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훌륭한 과외를 받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후기를 남깁니다...(중략)... 글쓰기 첨삭은 처음 받아봤는데 이렇게 제가 쓴 글을 읽고 대화 나눠본 건 처음이에요. 몹시 민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끄러움 없이 제가 쓴 글을 읽고 다른 분들의 반응도 들을 수 있었어요. 저의 브런치까지 미리 읽고 와주시는 정성과 글에 대한 세심한 조언 따뜻한 격려 모두 참 훈훈한 시간이었어요.”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인 나는 좋은 게 좋다는 말을 참 못 하는 사람이다. 남편과 연애하면서도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민망하게.’ 경상도에 살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줄 아는 은진님의 글을 읽으며 알게 됐다. 따뜻하고 구체적인 피드백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사실 첫 글쓰기 수업은 지금 생각해도 허둥지둥이었다.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랐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진심 하나만 가득했다. 창고살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온라인에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도 괜찮았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은진님의 후기를 보는 순간 꽉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용기 내서 글쓰기 살롱 시즌2도, 시즌3도 진행할 수 있었다.
세 번의 시즌 동안 글쓰기 살롱을 함께 하면서 은진님의 글은 달라졌다. 처음 글을 읽었을 때 주제가 명확하고 단정한 글이기는 했지만 분명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다 꺼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이 정도만, 선을 긋는 느낌이랄까. 글은 참 정직해서 행간 사이 망설임과 혼란스러움이 다 드러난다. 은진님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나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 혹시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은지, 이 부분은 아직 생각이 덜 정리된 것 같은데 어떤 고민이 있는지. 멤버들의 피드백이 더해지면서 질문은 더 풍성해졌다.
피드백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 은진님은 나와 멤버들이 던진 질문을 성실히 곱씹어 퇴고할 때는 초고보다 깊고 뾰족한 글을 써냈다. 시즌2, 시즌3로 갈수록 은진님의 글은 보이지 않던 막을 깨고 나온 듯 솔직해졌다. 은진님 특유의 무심한 위트도 더해졌다. 은진님이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지 기대됐다. 은진님이 멤버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정교해졌다. 동시에 글쓰기 살롱도 점점 방향성을 찾아갔다.
‘내가 무슨'이라는 의심은 수시로 찾아온다. 좀 더 준비된 다음에, 좀 더 완벽해진 다음에, 그다음에. 안타깝게도 그 완벽한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글쓰기 수업은 은유 작가나 이슬아 작가 정도는 돼야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은유 작가나 이슬아 작가가 될 수 없으며, 상대방도 내게 그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되면 됐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쪼안쪼'. 쪼는 듯 안 쪼듯 쪼는 것은 편집기자 시절부터 나의 특기 중 하나다. 그때의 노하우를 살려 멤버들이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하고, 글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읽으며 피드백을 고민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되지 못했어도 그동안 저널리즘 글쓰기부터 상세페이지 글쓰기까지 다양한 글쓰기를 경험하며 겪었던 시행착오를 멤버들과 아낌없이 나누려 했다.
무엇보다, 창고살롱이 그랬던 것처럼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글쓰기 살롱 1,2를 함께 한 은애님은 말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글은 잘 쓰는 사람만 쓰는 거라 생각했는데 글쓰기 살롱을 하면서 내 이야기가 담겼다면 모두 다 의미 있는 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초고를 독촉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 너무 잘 쓰려하지 말고 그냥 던지세요. 초고는 막 던지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퇴고가 있잖아요.”
완벽할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해보기. 부족한 나를 드러내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고 보완해가기. 글쓰기와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즌3를 마지막으로 나는 창고살롱을 떠났고, 오픈 클래스로 진행했던 글쓰기 살롱은 휴식기를 갖고 있다. 은진님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현진님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아마도 전 지금처럼 현진님 글을 읽으면서 힘을 내고, 글 쓸 용기를 내며 현진님을 응원할 거예요.”
쫀득하고 달콤한 반건시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시작하기를 잘했다고.
마릴라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