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프로젝트 연대기①]나는 왜 부캐를 만들었나?
지난 6월, 위커넥트에서 주최한 온라인 컨퍼런스 ‘계속 일하기 위한 6가지 방법’에 연사로 참여했다. 나는 이영실 ‘엄마 연구소’ 대표와 함께 ‘사이드 프로젝트도 커리어가 될까요?’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발표 제목은 ‘부캐를 시도할 용기 기르기’.
말을 하는 건 늘 자신 없다. 글은 발행 전에 몇 번이고 고칠 수 있지만(카톡 하나 보내면서도 퇴고하는 사람 ㅎㅎㅎ) 말은 한번 뱉어 버리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여유 있고 위트 있게 말하고 싶은데 늘 잔뜩 긴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고민 없이 발표하겠다고 한 건 김미진 위커넥트 대표의 섭외 메일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꽤 오랜 시간 현진님께서 마더티브-헤이마마-창고살롱으로 이어가시는 과정을 관찰하게 되었는데요. 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기 어렵다고 그냥 묻어두기보다는 잘-숙성해서 척척 펼쳐나가시는 모습을 맘속으로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계속 일하는 여성의 레퍼런스 중 하나인 현진님의 마더티브에서 창고살롱으로 이어지는 커리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요.”
미진님과는 ‘마더티브’를 인연으로 만났다. 이후 성수동 소셜벤처에 다닐 때 종종 런치 타임을 했고, 지난해에는 나와 인성님이 위커넥트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뭐라도 되겠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기도 했다.
발표를 위해 마더티브와 창고살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정리하면서 이후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점에서 말하기는 글쓰기와도 맞닿아 있다. 독자/청중을 상상하며 자신의 서사를 정리하다 보면 더 나은 말하기/글쓰기를 고민하게 된다.
사회생활 12년 차. 두 번의 퇴사는 모두 사이드 프로젝트 덕분에 했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이직도 사이드 프로젝트 덕분에, 창업도 사이드 프로젝트 덕분에 했다. 표면상으로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커리어’가 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걸 얻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 연대기를 정리해 보면 좋겠다 싶었다.
이 글에서는 강연에서 들려줬던 내용과 강연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스크롤 압박이 있다는 뜻).
발표를 준비하면서 내가 언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 계산해 보니 무려 7년 전인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두 번째 책인 <독립하고 싶지만 고립되긴 싫어>는 사이드 프로젝트로 나온 책이다. 편집기자 생활을 하면서 업무 외 시간과 휴가를 활용해 사회부에 있는 후배와 함께 기획과 취재를 하고 원고를 썼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2년 가까이 걸렸다.
지금까지 낸 네 권의 책 중 3권(<독립하고 싶지만 고립되긴 싫어><엄마는 누가 돌봐주죠?><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 모두 사이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정리하자 나라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뭔가를 하고 싶으면
1.레퍼런스를 찾아 글을 쓰고
2.함께 할 동료를 찾는구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건 내가 퇴사 꿈나무였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고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됐다. 입사 3개월도 안 돼서 알았다. 아, 기자는 나랑 잘 안 맞는구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 첫 번째 책인 <마을의 귀환>을 만들면서였다. 이웃이 사라진 도시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한 책이다. 서울과 영국에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도 지금, 여기가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싶었다.
언론에서는 문제점을 찾고 비판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그것이 언론의 본령이기는 하지만 나는 좀 더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일이란 나만의 쓰임새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일의 기준과 상은 있었는데 그게 어떤 일인지는 나도 몰랐다. 자꾸만 기존에 있는 직업 위주로 생각하게 됐다. 기자를 계속할 거면 이 회사에 다니는 게 낫겠고, 활동가는 자신 없고, 무작정 퇴사를 할 용기는 없었다. 안정적인 본업을 유지하며 본업 말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사이드 프로젝트는 ‘다른 삶의 방식은 없을까?’라는 사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1인 가구 커뮤니티를 취재한 <독립하고 싶지만 고립되긴 싫어>는 <마을의 귀환>의 후속 작업으로 나온 책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서울 중심주의라는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내 또래 청년들의 경험과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은 ‘레퍼런스’를 찾는 일이었다. 레퍼런스가 당장의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눈앞의 길만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큼은 알게 해 줬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서 누군가에게 해법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롤모델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도 이 시대를 먼저 살아보지 않았기에 명확한 지도를 가진 이가 없는 건 당연하다. 다만 우리는 먼저 하늘을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박초롱 <딴짓 좀 하겠습니다>
<독고> 출간 몇 달 후 나는 출산을 했고 폭풍 같은 육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엄마로 살아가는 건 힘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되자 나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니, 엄마가 되면 나는 사라지는 게 맞다고 온 세상이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많은지. ‘이렇게 해야 좋은 엄마’, ‘이거 안 하면 나쁜 엄마’ 프레임이 숨 막히면서도 강고한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은유 작가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기꺼이 싸우는 사람, 목소리 내는 사람 그리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책을 읽고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지역 맘 카페에 ‘아이 데리고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을 모집 글을 올렸다(맘 카페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린 게시물이었다). 일부러 페미니즘을 제목에 넣었다.
나 포함 3명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모였다. 아이들은 수시로 아팠고 모임은 몇 번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함께 울면서 이야기 나누던 순간만큼은 생생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독서모임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밤 10시, 아이 데리고 창고살롱 온라인 모임에 참여한 멤버들을 보면 4년 전 생각이 난다. 그때도 이런 모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육아휴직이 끝나고 회사에 복귀해서는 ‘육페(육아 페미니즘)’라는 이름의 사내 동아리를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모여 <빨래하는 페미니즘><케빈에 대하여> 등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모임에는 육아에 적극적인 남자 선배도 참석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더 선명하게 깨달았다.
‘엄마로 살아가면서 힘든 사람이 나만이 아니구나.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였구나.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더 크게 나눠야겠다.’
복직하면 꼭 하고 싶었던 게 또 있었다. 아이 말고 엄마를 위한 잡지를 만드는 것. 처음에는 종이로 된 독립 잡지를 생각했다. 잡지 키즈로 살아온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외따로 떨어진 글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인 주제가 있는, 읽을거리가 풍부한, 그러면서 너무 무겁지 않은 종이 잡지.
함께 할 후배를 꼬셨고 제목도 정했다. ‘주간애미’.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
그러다 본업에서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복직 후 몇 달이 지나 사는 이야기, 여행기, 서평 등 연성 기사를 편집하는 부서로 이동하게 됐다.
4년 전만 해도 엄마들이 ‘엄마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만큼 모성 신화가 강고했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의 저자인 장수연 PD를 인터뷰하고 ‘아이보다 내가 먼저, 이런 엄마는 비정상인가요?’라는 기사를 썼는데 아래에 줄줄이 ‘그런 엄마는 비정상’이라는 댓글이 달릴 정도였다.
이 기사는 글쓰는 엄마들의 놀이터 <주간애미> 창간호 첫 번째 기사였다. 온라인 매체의 성격을 살려 만든 일종의 웹진이었다. 워킹맘, 페미니스트 엄마, 중년의 엄마,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는 엄마 등 다양한 엄마를 필진으로 섭외해 연재 글을 실었다. 필진은 계속 늘어났고 해외 육아, 아빠 육아, 미니멀리즘 등 주제도 다채로워졌다. 독자들의 호응도 좋았다.
사적인 고민을 공적으로 확장해 주간애미를 기획한 경험은 이후 나를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웹진 <마더티브> 공동 창간이라는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마더티브는 비슷한 시기 임신, 육아, 출산을 경험한 회사 동료 4명이 함께 시작했다. 마더티브 탄생기는 여기에서.
마더티브의 슬로건은 '엄마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였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 '이거 안 하면 나쁜 엄마'라는 납작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완벽한 엄마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엄마의 모습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마더티브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텍스트, 영상 콘텐츠로 풀어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는 누구의 승인도 허락도 필요 없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우리가 만들고 싶은 방식으로 만들면 됐다. 성과에 대한 압박도 평가도 없었다. 이렇게 즐겁게 일하는 경험은 참 오랜만이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쪼개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영상을 찍었다.
그러다 이게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온 새로운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1.콘텐츠를 만들고
2.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3.개인의 삶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
엄마가 되면서 많은 걸 잃었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필요로 했던 것을 찾게 된 것이다.
일과 육아라는 본업에 마더티브라는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모두 병행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본업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9년 가까이 다닌 첫 번째 회사에서 퇴사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개월 만에 나는 다시 다른 회사에 이직을 한다. 마더티브 창업을 포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새로운 일의 3가지 조건에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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