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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08. 2019

애엄마의 딴짓... 밤을 새도 좋았다

[엄마의 퇴사13] 회사와 애만 있던 삶에 나타난 숨구멍

‘주간애미’는 가슴 설레는 기획이었다.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회사는 종합언론사였고, 주간애미 콘텐츠를 확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쉽게 말해 언제까지 엄마 얘기만 다룰 수는 없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의 주요 독자층이 정치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 중노년층 남성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아이 어린이집 문제 때문에 휴직한 2018년 5월.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 중인 회사 동기를 만났다. 아이들이 낮잠 자는 틈을 타 커피숍에 들렀다.


이야기를 나누다 동기도 일에 대해, 회사에 대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미 아이가 둘인 그는 나보다 더 고민이 깊었다. 회사가 답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회사를 벗어날 수는 없는 상황.


 

“회사 밖에서 한번 실험을 해보는 건 어때?
주간애미처럼 엄마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는 거야.”
 


동기도 나도 언론사에서 8년 넘게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글 쓰고 편집하고 영상 만드는 건 전문가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뭔가를 시도하는 건 부담됐다. 평가와 성과에 대한 압박 없이, 우리 마음대로 자율성을 가지고 일해보고 싶었다. 재밌게.  




깨는 엄마  


애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딴짓을 벌여도 될까 싶었지만 내 가슴은 어느새 또 뛰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았다. 다른 직장맘 두 명을 더 꼬셔서 작당을 시작했다. 이름하야 ‘깨는 엄마’. 엄마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깬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후 팀 이름은 고급지게 마더티브로 바뀌었다. 마더(Mother)+티브(Narrative). 엄마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을 담았다. 기존의 모성신화와 육아산업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엄마에게 공감과 위로가 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이왕이면 대안도 함께 제시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첫 번째 콘텐츠가 ‘국민애니 삐딱하게 보기’였다. <엉뚱발랄 콩순이>, <꼬마버스 타요>, <엄마 까투리> 등 아이들이 많이 보는 국민 애니메이션을 성평등 관점, 인권의 관점에서 뜯어보는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영상 보여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육아를 하다보면 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왕 보여주는 영상이라면 좀 더 제대로 알고 봤으면 했다.


처음 영상 촬영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전날 밤,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모인 멤버들은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대본 연습을 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서 뭔가를 해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고는 단 몇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영상 촬영을 했다.



'탈코르셋 운동' 의혹을 받았던 첫 번째 영상. 맨 왼쪽이 나(출처 : 마더티브)


영상 기자 출신인 동기를 제외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모두 처음이었다. 카메라 불빛이 들어오자 다들 얼음이 되어 발연기가 절로 나왔고(나는 래퍼로 빙의...아웃사이더인 줄), 전문촬영용 장비가 아닌 카메라는 자주 끊겼다. 어색하고 서툰데 이상하게 신이 났다.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막 분비되는 것 같았다.




마더티브


마더티브를 시작하면서 회사와 육아만 있던 삶에 숨구멍이 생겼다(이미지 출처 : pexels)



부모교육 전문기업 ‘그로잉맘’ 부대표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이혜린이 쓴 <엄마의 속도로 일하고 있습니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함께 창업 전선에 뛰어든 동지 무리들. 엄마라는 이름, 그리고 창업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함께 지고 소처럼 일하는 그녀들. 왜 아이를 낳고 나서야 순수한 열정이 생겨버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지 모르겠는 불가사의한 생명체들. 자기 인생을 최선을 다해 자기가 꼬고 있는 멋진 여자들. 그렇게 우리들은 정말 수명을 갉아먹어가며 새벽을 지새운다. p.96(e북)”


자기 인생을 최선을 다해 자기가 꼬더라도, 우리는 즐거웠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순전히 우리가 재밌어서, 다른 엄마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니.


한 멤버는 말했다. 10대 때는 서른이 넘으면 안정적으로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뭔가에 도전하고 있을 줄 몰랐다고. 30대인 우리는 여전히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엄마가 된 후 두 번째 사춘기가 시작됐다.


블로그와 브런치 대문에 쓴 마더티브 한 줄 소개글은 이렇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나를 찾고 싶은 네 명의 엄마들.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영상을 만듭니다.’



네 명의 멤버가 돌아가며 글, 그림, 영상을 올렸다.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엄마들을 위로했고, 애 둘 맘의 현실을 진솔하게 기록했다. 맘충 담론을 비판했고, 직장맘으로 사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엄마의, 엄마를 위한, 엄마에 의한, 엄마 중심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잠을 줄이고 밤을 샜다. 회사와 육아만 있던 삶에 숨구멍이 생겼다.


이게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새로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깜깜하기만 하던 길에 반짝 하고 빛이 보이는 듯했다.


두 번째 촬영을 며칠 앞두고, 아이는 뇌수막염 진단을 받았다.



[엄마의 퇴사 14]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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