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퇴사12] 지금 한가하게 엄마 이야기나 할 때냐고
육아휴직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애 말고 엄마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 엄마의 존재는 늘 아이로 대체된다. 대중교통 임산부석만 봐도 그렇다. 아이를 품은 ‘엄마’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란다. 엄마가 캐리어도 아닌데.
수많은 육아 관련 책은 아이를 위해 엄마가 꼭 해야 할 것을 열거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아이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건 모두 엄마 탓이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존재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엄마 자신의 꿈도 커리어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복직 후 발령 받은 곳은 사회팀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는 시민기자제로 운영됐다.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기사를 쓰면 에디터는 그 기사를 편집했다. 이슈에 따라 기획과 청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사회팀 에디터였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매일 이슈가 빵빵 터졌고 여론은 들끓었다. 하나의 이슈가 생기면 이전의 이슈는 금세 잊혔다. 한 이슈를 깊게 붙들고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1년 3개월을 떠나있다 돌아왔는데 또다시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를 위한 콘텐츠? 하루하루 이슈를 막아내는 것도 벅찼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복직 3개월. 대대적인 부서 개편이 진행되면서 나는 사는이야기 담당 에디터가 되었다. 사는이야기를 비롯해 책, 여행, 문화 등 이른바 연성 콘텐츠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팀원은 3명, 모두 직장맘이었다. “해보고 싶은 거 다 해.” 직장맘 선배인 팀장은 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두근두근,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주간애미였다. 아이 보는 틈틈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엄마들이 부담 없이 재미있게, 하지만 곱씹으며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필진을 물색하고 연재 내용과 일정을 조율했다. 역시 직장맘인 후배도 함께 기획에 참여했다.
내가 직접 취재를 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쓴 장수연 MBC 라디오 PD를 인터뷰했다. 육아 휴직 기간, 나 자신과 두 아이의 엄마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장수연 PD의 솔직한 글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책에는 ‘뼛속 깊이 효율적인 인간’인 그가 모유수유 하면서 보면대에 책을 펴놓고 일본어 자격증 공부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기분 좋게 마신 뒤 젖을 유축해서 버렸다는 고백도. 아이만큼 내 자신도 중요한 '욕망하는 엄마'. 그 모습이 어찌나 공감가던지. 꼭 한번 인터뷰 해보고 싶었다.
인터뷰 기사 제목은 아이보다 내가 먼저, 이런 엄마는 비정상인가요? 2017년 12월 발행한 ‘주간애미’ 첫 기사였다. 이 기사는 포털 대문에 걸렸고 어마어마한 악플이 달렸다. 요약하자면 ‘아이보다 엄마가 먼저면 비정상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댓글을 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모두 다르듯이 엄마의 모습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왜 우리 사회는 ‘좋은 엄마’라는 한 가지 스테레오 타입을 정해놓고 엄마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걸까. 두 번째로 인터뷰했던 부모성장 교육모임 ‘삐삐앤루팡’ 박지연 대표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에 엄마들 스스로도 갇혀 있고 사회도 그걸 요구해요. 엄마들이 고민을 이야기 하면 '누구나 다 그래, 그때는 다 그래' 개인의 문제로 한정을 하는데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터놓고 이야기 해보면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다들 하고 있어요. 이건 구조적 문제예요. 고민을 끄집어내서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이외에도 우수한 필력의 시민기자들이 ‘페미니스트 엄마가 쓰는 편지’, ‘워킹맘이 워킹맘에게’, ‘위기의 주부’, ‘명랑한 중년’ 등을 연재했다. 육아빠 시민기자가 ‘초보아빠 육아일기’를 쓰기도 했다. 시민기자 각자의 특성을 살린 콘텐츠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엄마가 '주어'가 된 솔직한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엄마 시민기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출판 시장에서도 엄마 에세이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1년 전, 주간애미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걱정이 많았다. 엄마도 아이 때문에 힘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된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엄마도 사람이다”라는 외침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임신·출산의고통을 극사실주의로 유쾌하게 그려낸 웹툰 <아기 낳는 만화>를 보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거대 권력의 비리, 갑질, 부정부패... 언론이 다뤄야 할 중요한 사회문제가 많다. 지금 한가하게 엄마 이야기나 할 때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모성신화에 짓눌려 몸도 마음도 아픈 엄마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다.
특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요즘 엄마들에게는 구닥다리 모성신화가 버겁기만 하다. 나 역시 그런 엄마 중 한 명이었다. 나 같은 엄마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분량 때문에 당시 기사에는 넣지 못했지만 장수연 PD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혼, 비출산 선택. 이해하고 또 응원해요. 아이를 낳고서 누리는 행복감, 성장하는 느낌 등 감동적인 게 많은데 다른 힘듦이 이걸 다 덮어버리니까요. ‘네가 그렇게 힘든 거 뻔히 아는데’라는 반응이 나오는 거죠.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행복감을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안에서는 독박육아, 밖에서는 맘충혐오와 경력단절. 엄마로 산다는 건 극한직업이다. 그러니 출산파업은 여성들이 고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둘째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러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기쁨'이라는 선택지를 아예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안타깝기도 하다. 한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게 마냥 불행하기만 한 일은 아닌데 말이다. 나조차도 그 기쁨을 종종 잊고 살지만.
장수연 PD의 말처럼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충분히 느끼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여성들에게 보다 풍부한 선택지가 주어졌으면 한다. 이런 나라에서 이미 아이를 낳아버린 나에게도, 아이를 낳아야 할까 고민하는 그녀들에게도.
여성이 엄마가 되어서도 나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는 계속 엄마로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 지금, 애 말고 엄마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