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퇴사15]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이 글은 제가 실제로 퇴사할 때 제출했던 사직서입니다.
직장맘으로 산다는 건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다. 육아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제 좀 키울 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변수가 나타나 뒤통수를 탁 친다. '애 키우는 게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어?' 하고.
'죄송해요, 애 때문에...' 부서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양해를 구할 때면 자괴감과 무력감이 밀려온다. 당장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직원이라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편으로는 애가 아픈 게 내 탓은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맨날 죄송하고 고마워야 할까 억울하기도 하다.
어차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퇴사를 고민하는데 이참에 확 그만둘까 싶다가도 이렇게 나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긴다. 적어도 아이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거봐,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 힘들어서 그만뒀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아이를 원망하게 될까 봐.
8년 전. 3개월간의 수습기간이 끝날 때쯤. 부서에 있던 유일한 여자 선배가 퇴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배의 환송회 날, 나와 여자 동기는 술에 취해 오열했다. 3개월간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럴 리가.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사인데.
주로 현장을 뛰는 외근 부서에는 여자 선배가 몇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직군이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선배가 떠난다는 게 막막했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가여운 어린양이 된 심정이랄까.
몇 년 후 나도 현장을 떠나 내근직으로 옮기게 됐다. 내가 여자라서는 아니었다. 업무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결혼하니까 내근직으로 가는구나’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래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에는 내근직 만한 데가 없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바뀐 업무에 만족하면서도 늘 여자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육아 휴직이 끝나고 복직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나름 업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고자 했지만 늘 ‘2등 직원’이 된 기분이었다(그 전에도 1등은 아니었지만^^).
퇴근 시간이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나서야 했고 회식이나 MT는 상상도 못 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늘 시간이 없었다. 으쌰 으쌰 호기롭게 일을 벌였다가도 아이에게 일이 생기면 바로 올 스톱.
‘믿을 수 없는 사람, 불안정한 사람. 저렇게까지 힘들게 회사를 다녀야 할까...’ 아이를 낳기 전, 직장맘 선배들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떠올랐다. 아마 여자 후배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지 모른다. 내 모습이 바로 본인들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면서.
아이가 둘인 한 직장맘 후배는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회사에서 버텨서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다고,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롤모델이 되고 조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세 돌만 지나도 괜찮아져, 다섯 돌만 지나도 괜찮을 거야.” 직장맘 선배들은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그때가 됐을 때 엄마가 일을 가지고 있어야 엄마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라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 이 순간도 중요하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병원과 약을 달고 살고. 이렇게 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번번이 회의하게 되는데. 내 안의 소중한 것이 망가지는 걸 매일매일 목도하는데. 그럼에도 버티기만 하는 게 옳은 걸까. 이러다 내가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 일과 육아를 도저히 함께 할 수 있는 부당한 체제에 투항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이렇게 꾸역꾸역 버텨서 내게 남는 건 뭐가 있을까.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나 혼자만 죽도록 노력하면 되는 걸까.
그보다는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롤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후배들은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과 육아를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일과 육아에 지쳐 그렇고 그렇게 스러져한 또 한 명의 여성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것도 해답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퇴사를 하면 답이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그저 버티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엄마의 퇴사 16]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