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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11. 2019

인간 휴롬의 탄생

[엄마의 퇴사16-에필로그] 공개사직서, 그 후

“니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회사를 안 그만뒀을지도 몰라.”



퇴사 일주일 후, 을지로 호프집. 커다란 맥주잔과 노가리를 앞에 두고 선배는 말했다. 취재 기자 시절 내 사수였고, 내가 취재 기자 그만둔 걸 늘 안타까워하는 남자 선배였다.


“남자들은 애가 있어도 어떻게든 계속 일하잖아. 물론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남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



쉰을 앞둔 선배는 아빠 육아휴직이 흔치 않았던 시절 육아휴직을 내고 신생아 딸을 돌봤다. 하지만 이후 일을 그만두고 경력단절이 되어야 했던 사람은 선배의 아내였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은 그날 술자리에 함께한 남자 동기를 두고 한 말이었다. 두 돌이 안 된 딸을 키우고 있는 동기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이제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지금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을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공개 사직서


퇴사할 때 선배들에게 받은 선물.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캐리커처



일주일 전, 광화문의 한 고기 집에서 회사 전체 환송회 하던 날.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남편은 내게 ‘인간 휴롬’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계속 눈에서 즙을 짠다며, 여우주연상 진상감이라고.


감사하게도 많은 이들이 내 퇴사를 축하해줬다. 내 사직서를 읽은 한 남자 선배는 말했다. 자신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고.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출산을 앞둔 여자 동기는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다고 했다(괜찮아, 나도 아이 낳기 전에는 정말 몰랐어). 또 다른 여자 선배는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글을 썼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또 눈물이 쏟아졌다.


내 사직서는 회사 내부 게시판에 올라갔다. 본부장은 혼자 보기 아깝다며 ‘홍현진 사직서’라는 제목으로 게시물을 올렸다. 물론 내 동의를 얻고.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가 아니라 굳이 기나긴 사직서를 쓴 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직장맘의 현실을 알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내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아 기뻤다. 일과 육아의 양립에 대한 고민은 이제 여성들만의 몫이 아니다. 남성들 나아가 회사와 사회 차원에서도 치열한 고민과 변화가 필요하다.


남편과의 협상


퇴사하면서 남편과 나는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까지 남편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내 퇴사로 인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사람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퇴사를 고민하는 시간은 삶의 우선순위를 조율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의 커리어와 남편의 커리어 그리고 아이, 세 가지가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퇴사를 하면서 남편과 내가 정한 두 가지 원칙은 이랬다(써놓고 보니 아름답지만 굉장히 지난한 투쟁이 있었음을 밝힌다).


1. 1년간 수익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본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다행히 지난 9년간 일해 온 퇴직금이 있으니 그 돈으로 적어도 1년은 수익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보기로 했다. ‘마더티브’ 일을 중심으로 글 쓰고 콘텐츠 만드는 일을 계속하면서 수익 모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퇴사를 고민한 건 퇴사를 너무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이 회사를 나가면 다시는 일을 하지 못 하게 될까봐. 하지만 나는 고작 30대 중반이고,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1년이 지났는데 이렇다 할 비전이 안 보이면 다시 구직활동을 하는 걸로. 그때 걱정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걸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2. 퇴사 전과 동일하게 가사와 육아를 분담한다


퇴사 후 1년간, 당장 돈이 안 되더라도 나는 계속 일을 할 것이다. 내게 맞는 새로운 일을 찾아 계속 작당을 벌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사와 육아의 부담이 내게 고스란히 넘어온다면 퇴사의 의미는 퇴색된다. 내가 퇴사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지점이었다.


퇴사 후에도 기존과 동일하게 남편이 등원을, 나는 하원을 맡기로 했다. 가사 노동 역시 지금처럼 함께 하기로(그래도 내가 좀 더 많이 하겠지만). 대신 나는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출퇴근 하듯이 성실하게.


남편과 나는 이번 기회를 서로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반대로 내가 남편에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남편에게 너무 억울해 말라고^^  


폴짝


엄마이기 때문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덥고 힘들었던 여름, 바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회사를 안 그만뒀을지도 모른다’는 선배의 말은 절반만 맞다. 엄마이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건 맞다.


하지만 엄마이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아이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퇴사라는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알고 보면 쫄보인 내가 말이다.


“내가 발휘한 용기란, 결국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폴짝 점프한 정도였다. 삶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길 기대할 때,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이 아니라 오른쪽 혹은 왼쪽의 어딘가여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엔 전진도 후퇴도 없다. 높고 먼 방향으로 점프하는 것만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 주지는 않을 것이다.” 송은정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p.17~18


내 도전이 성공으로 끝날지 실패로 끝날지는 모르겠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인생은 길고, 한 발짝이라도 어딘가 나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엄마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일,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삶의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1년이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곧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다.



*[엄마의 퇴사] 연재를 마칩니다. 퇴사 후 이야기는 계속 브런치 통해서 전할게요. 마더티브에도 계속 글 올리고 있고요. 그동안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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